삼국지 - 곽여왕 (문덕황후 곽후 문덕곽황후)

삼국지 곽여왕 (문덕황후 곽후 문덕곽황후)

 

곽씨은 안평군 광종현 출신으로 후한 말 남군태수를 지냈던 곽영의 딸입니다곽영은 동씨와 결혼하여 아들 셋딸 둘을 낳았습니다첫째 달은 곽욱이고 둘째 딸이 곽씨입니다곽영은 곽씨가 태어났을 때 상서로운 기운이 있다고 느꼈습니다광영은 이 아이는 내 딸 중에서 왕이 될 자격이 있다.” 라며 곽씨의 자를 여왕(女王)이라고 지었습니다.

 

동궁에 들어가다

곽여왕은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전란으로 유랑을 했고 동제후에게 의지하기도 했습니다조조가 위공이 되었을 때 곽여왕은 눈에 띄어 동궁에 들어가 조조의 아들 조비의 시중을 들었습니다곽여왕은 지모와 술수가 있어 조비에게 조언을 해주었고 조비가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귀빈이 되다

조조가 죽고 조비가 뒤를 이었을 때 곽여왕은 부인으로 봉해졌고 조비가 제위에 올랐을 때 귀빈이 되었습니다.

 

곽여왕의 동생이 곡주현의 관리로 있을 때 배를 훔치다가 걸려서 포신에게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황후가 되다

조비의 부인 문소황후 견씨가 죽자 조비는 곽귀인을 황후로 세우려고 했습니다중랑 잔잠 등이 상소를 올리며 반대했지만 조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곽귀인을 황후로 삼았습니다.

 

곽귀인(곽여왕)이 황후가 된 후 곽황후의 사촌 오빠 곽표가 곽황후의 아버지 곽영의 뒤를 이었고 봉거도위에 임명되었습니다곽황후는 친척들이 세력의 강성함을 보고 다른 나라의 사람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언니의 아들인 맹무가 향리가 되어 첩을 구하는 것을 제지하기도 하며 일가친척들을 단속했습니다.

<위서>에 따르면 곽황후는 한 황조의 친척으로 스스로를 온전하게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적은 것은 모두 교만하고 사치스러웠기 때문이니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습니다.


 

 

 



224년 조비가 동쪽의 오나라를 정벌하러 갔을 때 곽황후는 허도(허창)의 영시대에 남아있었습니다장마비가 백일 이상 내려 성벽과 누각이 파손되어 관리자가 그녀에게 다른 거처로 옮길 것을 청했습니다곽황후는 초나라의 소왕과 그의 부인 정강에 예를 들며 거처를 옮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225년 조비가 오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광릉에 이르렀을 때 곽황후는 초궁에 남아 있었습니다곽황후의 경호를 위해 곽표가 남아 있었는데 곽표는 물길을 막고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습니다곽후는 곽표를 말리며 물길은 전쟁의 물자를 수송하는 뱃길이므로 막힘이 없어야 한다며 그를 말렸습니다.

 

조비가 죽고 조비의 아들 조예가 뒤를 이었습니다곽황후는 황태후로 책봉되었고 영안궁에 거처하게 되었습니다.

 

죽음

235년 곽태후는 허도(허창)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그녀의 유언에 따라 수량릉의 서쪽에 매장 되었습니다.

 

 


견황후, 곽황후, 조예


견황후는 조비의 부인으로 조비가 새로 귀빈이 된 곽여왕을 총애하자 이를 원망하다가 조비의 자결 명령을 듣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진춘추>, <위략>에는 견황후의 죽음이 곽여왕이 중간에서 조비와 견황후를 모략한 음모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견황후가 죽은 뒤 곽여왕은 시체의 정돈된 머리카락을 어지럽히고 입에 쌀겨를 담게 했다고 합니다

견황후가 죽은 뒤 곽여왕은 황후가 되었고 자식이 없는 그녀에게 견황후의 아들인 조예를 보살피도록 했습니다.

조비가 죽고 조예가 뒤를 이었습니다조예는 곽후를 극진하게 대접하다가 235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재수사를 명한 뒤 곽후를 처형했습니다조예는 시체의 머리카락을 어지럽히고 입에 쌀겨를 담게 하며 어머니가 죽을 때와 똑같이 매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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