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한국전쟁 625 전쟁)


6.25전쟁 한국전쟁 6.25 육이오





 

6.25전쟁(한국전쟁) 1950월 6월 25일 ~ 1953년 7월 27

휴전 1953년 7월 27일 현재


1945815일에 일본은 항복했고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미국, 소련 양군에 의해 분할되었습니다. (815일 광복절)


19488월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했습니다. 9월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별개의 정권을 수립해 분단을 공식화했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군사력을 증강했고 남한은 장비가 빈약해 상대적으로 열세인 상태였습니다.


전쟁의 발발


1950625일 새벽 4시에 북한이 남한을 불법 남침하여 6.25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전에 계획되고 상대적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북한

열세인 군사력과 625일 일요일이었고 농번기로 인한 대규모의 외박, 외출로 실제 배치 된 병력을 더 적었던 남한

북한군이 초전에 우세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627일 미국은 UN군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전쟁 3일 만에 서울을 점령당했고 73일에는 한강을 넘어 전선이 계속해서 밀렸습니다.

국군과 UN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안은 인천이 지형 상 상륙작전을 하기 부적합하고 부산 교두보에 증원, 군산으로 변경 등의 의견들이 나왔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6시간은 상륙작전을 위해 사용 가능하며 북한군의 이목이 부산에 쏠려있어 방어가 소홀하고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크게 작용한다는 주장으로 98일 허가를 받아냅니다.

삼척, 남포, 군산에서 공격을 하면서 북한의 눈을 돌리고 정보전을 통해 북한의 예비 부대를 낙동강 전선에 투입시키도록 유도했습니다.


915일 새벽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해서 월미도 제압, 인천항 상륙, 인천 남동부 상륙으로 다음날 아침 인천을 완전히 되찾았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도 대대적인 반격작전이 펼쳐졌습니다.

인천 지역을 되찾은 후 926일 서울로 진입했고 27일 중앙청을 탈환하고 태극기를 게양하는데 성공했습니다. 27일 밤 서울 일대의 북한군을 전부 후퇴시킵니다.

 

101일 국군은 38선을 넘어 진격하였습니다. (101일 국군의 날)

1019일 평양을 점령했고 11월 말 압록강과 두만강 지점까지 진격했습니다.

 

 

 

 


중국군의 참전


중국군은 10월 중순부터 한반도에 진입해 있었었습니다.

1125, 26일 중국군이 18개 사단의 막대한 병력으로 서부전선을 공격해옵니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번 바뀌었고 12월 평양을 내주었습니다. 중국군의 원조에 힘입은 북한군은 1226일 다시 38선을 넘어 침략햇습니다.

195114일에는 서울을 재점령 당하고 맙니다


UN군은 125일부터 반격을 재개하며 210일 인천, 김포를 탈환하고 314일에는 서울을 재탈환, 324일에는 38선을 재 돌파했습니다.

 

4월 중국군의 춘계대공세 이후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습니다.

7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렸고 26일 의제에 합의했으나 경계선 책정문제 교착상태에 빠져 822일 공산측이 중단성명을 내면서 회담이 정지되었습니다.

1025일 판문점에서 유전 회담이 다시 시작되었고 포로 송환 문제 대립(중공측은 일괄송환, 유엔측은 자유송환) 으로 다시 교착상태에 빠져듭니다.



이후 계속되는 전쟁 중 휴전의 결과로 제시될 휴전선이 정해지기 전 고지전이 치열하게 이루어졌는데 2년간의 걸친 고지 전쟁에서만 5만 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대표적인 전투로 백마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 등이 있습니다. (영화 고지전은 19532)

 

1953727일 길고 긴 정전 협상으로 계속되는 대립과 난항을 겪다가 마침내 휴전협정이 이뤄지면서 31개월에 걸친 전투가 중지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휴전 중인 상태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위키백과나무위키>


 

6.25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와 전쟁이산가족, 전쟁미망인, 전쟁고아들이 생겼습니다. 국토의 80% 이상이 파괴되었고 물적 피해도 컸습니다. 단순히 숫자로만 계산 할 수 없는 비극으로 너무나 가슴 아픈 엄청난 상처를 남겼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