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장합 ( ? ~ 231년) 위 한복, 원소, 조조, 조비, 조예
장합은 기주 하간국 막현 사람으로 자는 준예(儁乂)입니다. 장합은 젊은 시절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모병의 응해 황건적을 토벌하며 군사마가 되었고 한복의 휘하에서 활약했습니다.
원소
한복이 몰락하면서 장합은 병사를 이끌고 원소의 밑으로 들어갑니다. 원소는 장합을 교위로 임명했고 장합은 원소군과 공손찬군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우며 영국중랑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원소군과 조조군이 관도에서 싸웠을 때 원소는 순우경에게 군량고인 오소를 지키게 했습니다. 장합은 원소에게 조조의 병사들이 정예병들이기 때문에 순우경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며 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곽도는 조조의 본진을 치면 조조군은 회군할 것이라며 조조군의 본진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장합은 곽도의 말을 듣고 조조군의 진영이 견고해서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할 것이라며 순우경이 잡힌다면 모두가 위험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원소는 경기병(경무장한 기병)을 순우경에게 원군으로 보내고 대군으로 조조군의 본진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원소가 조조의 본진을 함락시키기 전에 조조가 순우경을 격파했습니다.
이때 장합은 조조군에 투항하는데 엇갈린 기록들이 있습니다. <장합전>에는 원소군이 대패하고 곽도가 장합에게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움직임을 보여 이를 두려워한 장합이 조조에게 투항한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무제기>, <원소전>에는 장합이 순우경이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합이 조조에게 투항하면서 원소군이 무너져 대패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조
조조는 장합이 투항해오자 은나라의 주왕의 폭정을 간언하다가 통하지 않자 주나라에 투항한 미자, 항우를 버리고 한나라에 투항하며 유방을 섬긴 한신에 비유하며 크게 기뻐했고 장합을 편장군에 임명하고 도정후에 봉했습니다.
조조의 휘하에서 장합은 조조를 수행하며 원가의 본거지인 업을 공격해서 함락시켰고 기주 발해군에서 원소의 아들 원담을 공격했습니다. 또 별도로 군을 이끌어 유주 어양군 옹노현을 포위해 함락시켰습니다.
조조가 유성을 토벌할 때 장합은 장료와 함께 선봉을 맡아 공을 세우며 평적장군으로 승진했습니다. 또 장합은 군을 이끌며 청주 동래군의 관승을 격파하고 장료 등과 함께 진란, 매성 등을 토벌했습니다.
조조군과 마초, 한수군이 싸울 때 장합은 위수 남쪽에서 마초, 한수를 격파하고 안정을 포위해서 양추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마초가 도망친 뒤 장합은 하후연과 함께 양흥과 무도의 저족을 격파하며 장안과 양주 일대를 평정했고 마초가 다시 힘을 모아 왔을 때 마초를 격파하고 송건을 평정했습니다.
조조가 장로를 공격할 때 조조는 장합은 보내 흥화의 저족의 왕 두무를 치게 했습니다. 조조가 산관을 지나 한중으로 들어갈 때 또 다시 장합을 보내 선두에서 길을 뚫게 했고 양평에 도착하자 장로는 항복을 해왔습니다. 조조는 총대장을 하후연으로 하고 장합을 함께 한중에 남게 하며 수비를 맡게 했습니다.
한중공방전
하후연에게 촉 정벌을 건의했지만 조홍의 반대로 인해 장합은 군령장을 쓰고 따로 군을 이끌고 파동, 파서 2군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내고 그곳의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겼습니다. 익주 파군 탕거현으로 진군해서 유비군의 장비와 싸우게 되는데 장비에게 대패하면서 대다수의 병력을 잃고 겨우 도망쳤습니다. 이 패배로 장합은 처벌당할 위기에 빠졌지만 조조가 직접 사면을 시키며 처벌을 면했습니다.
유비가 양평으로 다가와 주둔하자 장합은 광석에 주둔하며 유비를 견제했습니다. 유비는 정예 1만 군사를 이끌고 밤중에 장합을 습격했습니다. 장합은 병사들을 이끌고 유비군과 치열하게 싸웠고 하후연은 장합에게 지원 병력을 보냈습니다. 유비군은 장합에게 지원 병력을 보내 병력이 적어진 하후연을 공격했고 하후연이 황충에게 쓰러지면서 총대장을 잃어버린 조조군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후연보다 장합을 꺼려했던 유비는 총대장인 하후연을 잡았음에도 ‘우두머리를 잡아야지 이 자를 잡아서 무엇에 쓰겠는가.’ 라고 했습니다. <위략>
조조군의 곽회는 장합 장군은 국가의 명장으로 유비가 두려워하고 있고 지금 이 긴급한 상황은 장합이 아니면 누구도 안정시킬 수 없다며 장합을 총대장으로 삼았습니다. 장합은 나서서 군사들을 격려했고 모든 장수들이 장합의 명령에 따르면서 조조군은 혼란에서 벗어났습니다. 이후 조조가 직접 한중에 와서 유비군과 대치하다가 조조군이 한중에서 철수하고 장합은 한중과 장안 사이에 있는 진창에 주둔했습니다.
조비
220년 조조가 죽고 아들 조비가 뒤를 이었습니다. 장합은 좌장군에 임명되고 도향후에 봉해졌습니다. 조비가 황제가 되면서 장합은 막후에 봉해졌습니다.
장합은 조진과 함께 안정의 노수호와 동강을 토벌했고 조진, 하후상과 함께 오나라의 강릉을 공격할 때 장합은 군을 이끌고 장강 중주의 요새를 점령했습니다.
조예
226년 조비가 죽고 아들 조예가 뒤를 이었습니다. 조예는 장합을 남쪽으로 보내 형주에 주둔하게 했고 장합은 사마의와 함께 손권군의 유아를 격파했습니다.
228년 촉의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했습니다. 장합은 제갈량의 부장인 마속과 가정에서 싸웠습니다. 마속이 험한 산에 의지하며 성을 차지하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장합은 마속군의 물길을 끊은 후에 공격해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장합은 촉한군에게 호응한 남안, 천수, 안정 삼군을 평정했고 식읍 1000호가 늘어 모두 4300호가 되었습니다.
촉의 제갈량이 다시 출진해 진창을 급습했을 때 조예는 하남성으로 가서 주연을 베풀며 장합을 보냈습니다. 조예가 장합에게 ‘장군이 늦게 도착하며 제갈량이 진창을 차지하지 않겠소?’ 라고 묻자 장합은 ‘신이 도착하기 전에 제갈량은 이미 달아났을 것입니다. 제갈량의 군량은 10일 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장합이 남정에 도착하자 제갈량은 퇴각했고 장합은 정서거기장군(거기장군)으로 승진했습니다.
죽음
231년 촉의 제갈량이 다시 기산으로 출진했을 때 장합은 약양으로 갔습니다. 제갈량군이 물러나 기산을 지키자 장합이 추격했고 목문에 이르러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장합은 날아온 화살에 오른쪽 무릎을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갈량군이 퇴각할 때 사마의는 장합에게 추격을 명했고 장합은 ‘군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항상 한쪽을 열어두어야 하고 궁지에 빠져 퇴각하는 군대를 추격하지 말라 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마의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고 장합은 제갈량군을 추격하다가 높은 지형에 숨어 있던 복병의 화살 공격에 넓적다리를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위략>
장합이 죽고 아들 장웅이 뒤를 이었고 조예는 장합의 아들 4명을 열후에 봉하고 막내아들은 관내후에 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