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고순 ( ? ~ 198년) 후한 말 여포
고순은 여포의 장수로 따로 열전을 찾아볼 수 없지만 <후한서 여포전>, <영웅기>, <구주춘추> 등에서 그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포를 구하다.
196년 여포의 장수 학맹이 반란을 일으켰고 배후에는 원술, 여포의 참모 진궁이 있었습니다.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여포는 대응도 하지 못하고 고순의 진영으로 달아났습니다.
고순은 여포에게 상황 설명을 듣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 학맹일 것이라고 추측했고 궁수들에게 화살로 학맹군을 공격하게 하며 그들을 무찔렀습니다.
학맹의 부장 조성이 학맹에게 반기를 들어 서로 대립했고 고순은 학맹을 참수하고 조성을 여포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조성은 원술과 진궁이 배후에 있었다고 말했지만 여포는 진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일을 불문에 부쳤고 조성을 용서했습니다.
여포에게 간언하다.
197년 여포는 낭야상 소건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개양에 있던 장패가 소건을 치고 거를 점령하는 바람에 여포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분노한 여포는 군대를 이끌고 장패를 공격하려했고 고순은 여포에게 간언하며 여포를 말렸습니다.
"장군께서 몸소 장군께서 몸소 동탁을 주살하여 이적들에게 위세를 떨쳤으니 단좌고분한다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자연 외복할 것입니다. 가벼이 친히 출군해서는 안 됩니다. 혹 이기지 못한다면 명성을 손실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포는 고순의 말을 듣지 않고 장패를 공격했다가 병력만 잃은 상태로 돌아왔고 얼마 후에 여포와 장패는 다시 화해했습니다.
유비를 치다.
198년 여포는 고순과 장료 등에게 소패에 있던 유비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고순은 장료 등을 이끌고 소패성을 공격했고 결국 함락시키며 유비의 가족을 포로로 잡고 유비를 구원하러 온 조조군의 하후돈까지 격파했습니다.
죽음
조조와 전쟁을 하던 여포는 하비성까지 몰리며 분전했지만 결국 패했고 고순도 여포와 함께 조조군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고순은 조조에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처형당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순과 함진영
고순은 청렴결백하고 위엄이 있었습니다. 과묵하고 술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뇌물도 받지 않았습니다. 7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있었지만 1000명으로 불렀고 고순의 부대는 공격한 상대를 반드시 격파했기 때문에 함진영(陷陣營)이라고 불렸습니다.
고순은 여포에게 자주 간언했습니다.
"무릇 집안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충신이나 밝고 지혜로운 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들이 쓰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군께서는 거동하실 때 치밀히 생각하지 않고 번번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길 좋아하시니 그런 잘못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여포는 고순의 충성심을 알았지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고순의 병사를 친척인 위속에게 주었고 전투가 있을 때는 위속의 병사를 고순에게 주어 싸우게 하며 중용하지 않았지만 고순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 고순은 여포가 조조가 없는 연주를 빼앗을 때 등장합니다. 복양에서 조조군과 전투할 때 조조를 바로 뒤까지 쫒았지만 전위에게 격퇴되고 여포군이 조조군에게 패하고 연주에서 도망칠 때 여포의 가족을 호위했습니다.
여포가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칠 때 원술군과 대치하던 유비군을 배후에서 공격해 격파하고 원술이 여포를 공격하러 왔을 때 원술군의 교유를 격파했습니다.
소패성에 있을 때 하후돈과 일기토를 하다가 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칩니다. 부하 조성이 화살을 쏘아 하후돈의 눈을 맞추면서 위기에서 벗어나고 이후 하후돈군을 격파합니다.
최후에는 하비에서 여포와 함께 붙잡혀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처형당합니다.
게임에서의 고순
삼국지 게임으로 유명한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최강의 무력을 가진 여포군의 장수로 장료와 함께 여포군의 주력 장수로 활약합니다. 고순의 함진영이 반영된 것 때문인지 통솔력과 무력이 매우 뛰어난 장수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