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 장로

삼국지 장로

 

장로는 예주 패국 풍현 출신으로 자는 공기(公棋)입니다.


오두미도

장로의 할아버지 장릉은 서천 지방에서 오두미도교를 창시했습니다. 오두미도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쌀 다섯 말(5)을 바쳤기 때문에 이름이 오두미도가 되었습니다.

장릉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장형(장로의 아버지)가 뒤를 이었고, 장형이 세상을 떠나고 장로가 뒤를 이었습니다.

 

유언

익주목 유언은 장로를 독의사마에 임명하고, 별부사마 장수와 함께 한중태수 소고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한중을 차지한 후 장로는 장수를 해치고 그의 군세를 거두었고, 유언의 명에 따라 한중에서 장안으로 가는 길을 끊고 조정의 사자를 해치기도 했습니다.

 

유장

유언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유장이 뒤를 이어 익주목이 되었습니다. 장로는 유장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유장은 장로가 자신의 따르지 않자 그의 어머니와 가족들을 모두 해쳤고, 두 사람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유장은 방희를 보내 몇 차례 장로를 공격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한녕

장로는 한중에서 독립해 한중의 이름은 한녕으로 바꿨고 스스로를 사군(師君)이라 칭했습니다. 가장 아래에 있는 제자를 귀졸(鬼卒), 신자를 간령(姦令), 좨주(祭酒) 등으로 부르며 한중과 파에서 제정일치의 종교 왕국을 세웠습니다.

 

좨주들은 부하들을 인솔하고 백성들을 가르쳤고, 사람이 많으면 치두대좨주라고 불렀습니다. 병자에게는 자기 과실(잘못이나 허물)을 털어놓게 했고, 의사라는 무료숙사 시설을 만들어 쌀과 고기를 두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법을 어긴 자는 세 번 용서한 후에 처벌했습니다.

 

후한 말의 조정은 장로를 토벌할 힘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사자를 보내 장로를 진민중랑장, 한녕태수로 임명하고 공물을 받았습니다.

 


염포의 조언

백성이 땅에서 옥인(옥으로 된 인장)을 발견해 장로에게 바쳤습니다. 사람들은 장로를 한녕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는데 공조 염포가 반대했습니다.


염포 한천의 백성들이 많고, 생산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하고, 사방이 요새이니 당신이 천자를 보좌할 수 있다면 춘추시대의 제환공, 진문공 같이 될 것이고, 두융처럼 부귀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왕으로 불림을 잠시 미루어 재앙을 초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장로는 염포의 의견을 따라 왕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조조

211년 조조는 종요를 보내 장로를 토벌하려고 했습니다. 한수와 마초 등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반기를 들어 조조와 싸웠습니다. 한수와 마초와 조조와 전쟁을 하면서 관서의 주민 수만 명이 장로에게로 갔습니다.

 

마초와 한수는 조조를 위기에 몰아넣기도 했지만 결국 패배했습니다. 정은, 후선, 이감은 마초와 함께 싸우다가 이감은 세상을 떠나고 정은, 후선은 장로가 있는 한중으로 도망쳤습니다. 마초는 양주에서 재기를 노리다가 결국 장로에게 의지했습니다.

 

장로는 마초를 도강좨주로 임명했습니다. 마초와 자신의 딸의 결혼을 추진했다가 반대하는 의견이 나와 그만두었습니다. 장로는 마초에게 병사를 주어 양주를 회복하게 했습니다. 마초는 장로가 함께 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근심 끝에 유비에게 귀순했습니다.

 

215년 조조가 장로를 토벌을 시작했습니다. 조조가 양평관에 도착하자 장로는 항복을 하려고 했지만, 장로의 동생 장위가 반대하며 군대를 지휘하며 양평관에서 방어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양평관이 함락되었습니다.

 


염포의 조언2

장로는 다시 한 번 항복하려고 했는데, 염포가 말했습니다.

염포 지금은 쫓기는 상태로 항복해도 공로가 크지 않을 것입니다. 두호를 달아나게 하여 박호와 항거하도록 한 이후에 항복하면 공로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장로는 염포의 의견을 받아들여 파중으로 물러나 항거햇습니다.

 

장로의 측근 중에는 떠날 때 창고와 재화를 불태우자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로 지금 도망치는 것은 조조군의 예봉을 피해보려고 하는 것이지 나쁜 뜻이 없소. 진귀한 물품을 쌓아놓은 창고는 국가의 것이오.”

장로는 창고와 재화를 불태우지 않고 떠났습니다.

조조는 후에 이 말을 듣고 장로를 크게 칭찬했습니다.

 

조조는 한중을 점령한 후 한녕이라는 이름을 옛날의 한중으로 되돌렸고, 군현제로 바꾸어 관리를 파견했습니다.

 


항복

21511월 본래 귀순할 마음이 있었던 장로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조조에게 항복했습니다. 장로는 마초의 첩이 동씨를 염포에게 시녀로 보내고, 마초의 아들 마추를 참수해서 조조에게 바쳤습니다. 동씨는 염포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조조는 사람을 보내 진남장군에 임명하고 낭중후로 삼아 식읍 1만 호를 주었습니다. 장로의 다섯 아들과 염포를 열후에 봉했고, 조조의 아들 조우와 장로의 딸이 결혼했습니다.

 


죽음

216년 장로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장부가 작위를 이었고, 다른 아들 장성이 오두미도 종단을 이었습니다. 장로에게는 원후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도교

삼국시대에 형성된 도교의 원류로 태평도와 오두미도가 있습니다. 태평도의 경우에는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반면 오두미교는 천사도라는 이름으로 계속되어 도교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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