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 왕기 (백여)

삼국지 왕기

 

왕기는 청주 동래군 곡성현 출신으로 자는 백여(伯輿)입니다. (190~261) 

왕기는 이름이 같은 위나라의 장수 왕기(백여)와 왕기(공여 또는 공석) 2명이 있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왕기는 어려서 아버지 왕표를 여의고 숙부(작은아버지) 왕옹과 함께 살았습니다. 왕옹은 왕기를 친아들처럼 길렀고, 왕기는 왕옹에게 효심으로 대했습니다.

 

왕기는 17살에 군리가 되었지만 일이 맞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낭야에서 학문에 힘썼습니다.

 

황초 연간(221~227) 왕기는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을 지냈습니다.




왕릉

청주가 평정되고 청주자사 왕릉은 왕기를 청주별가로 등용했습니다. 왕릉이 청주를 잘 다스린다는 명성을 얻었는데 이는 왕릉을 보좌하는 왕기의 공이 컸습니다.


이후 조정에서 왕기를 비서랑으로 임명하여 불러들이자, 왕릉은 왕기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도 왕랑이 왕기의 능력을 인정하여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했지만, 왕릉이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사마의가 왕기를 초청했고, 결국 조정에서 왕기를 등용하여 중서시랑에 임명되었습니다.

 

 


조정에서

명제(조예)가 성대한 궁궐을 건축하여 백성들이 힘들어지자 왕기는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동시에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말을 인용하여 염려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백성들을 물에 비유한 말)

 

산기상시 왕숙은 여러 경전의 해석을 쓰고, 정현의 학설에 반대했습니다. 왕기는 정현의 편에서 왕숙과 논쟁했습니다.

 

왕기는 안평태수로 승진했지만 공적인 사건으로 인해 관직을 떠났습니다.




조상

대장군 조상이 왕기를 초빙해 종사중랑으로 임명했습니다


왕기는 종사중랑이 되었다가 안풍태수가 되었습니다안풍군은 오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습니다

왕기는 공정하고 엄하게 다스리며, 방비를 단단하게 하여 오나라의 침입을 막았습니다.


오나라의 손권이 건업에 병사를 모으고 양주를 공격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양주자사 제갈탄이 왕기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왕기 오나라에 육손 등은 이미 죽었고 현명한 후사가 없습니다. 손권은 내분의 여파를 염려하여 직접 움직이기 힘듭니다. 손권의 움직임은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왕기의 예상대로 손권은 출진하지 않았습니다.




조상이 권력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자 왕기는 시요론을 지어 당시의 정치를 비판했습니다.


249년 고평릉의 변으로 사마의가 정권을 잡고 있던 조상과 그 일당을 처형했습니다.

왕기는 병으로 잠시 휴직했다가 하남윤에 임명되었는데, 조상 휘하의 관리였기 때문에 부임하기도 전에 관례에 따라 면직되었습니다.

 

왕기는 다시 등용되어 상서를 지냈고, 지방으로 나가 형주자사가 되어 양열장군의 호를 더했습니다.


 

 

 



오나라

정남장군 왕창이 오나라를 공격하는데 왕기도 함께 했습니다. 왕기는 별도로 군사를 이끌어 이릉의 보협을 공격했습니다. 보협은 성문을 굳게 닫아 방어했기 때문에 공격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왕기는 공격하는 척 하면서 병사를 나누어 신성태수 주태와 함께 웅부의 식량고를 공격했습니다. 30여만 석의 식량을 얻었고, 안북장군 담정을 포로로 잡고, 수천 명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항복한 사람들을 이주시켜 이릉현을 세웠고, 이 공으로 관내후에 임명되었습니다.

 

왕기는 왕창에게 상주하여 상창에서 강하로 관소를 옮겨 하구를 견제해 오나라가 함부로 장강을 넘지 못하게 했습니다. 왕기는 제도, 군대, 농업을 정비하며 남방에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사마사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조모(고귀향공)이 제위에 오르고 왕기는 상락정후에 봉해졌습니다.

 



관구검, 문흠의 난

관구검과 문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사는 동생 사마소에게 낙양을 맡기고 직접 출진하여 양양으로 향했습니다. 진동장군 제갈탄에게 수춘을 공격하게 하고, 정동장군 호준에게 귀로를 끊게 했으며, 형주자사 왕기에게 진남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사마사는 왕기의 의견을 채택해 남돈 지역을 점령했고, 관구검은 갈옹의 의견을 듣고 남돈을 취하려 하지만 한발 늦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하여 항성으로 돌아갑니다.

 

사마사는 연주자사 등애에게 낙가성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문흠은 관구검과 상의해 낙가성으로 진군합니다. 왕기는 상대의 전력이 둘로 나뉘었다는 것을 알고 관구검이 있는 항성을 공격했습니다. 항성을 함락시킨 왕기는 진남장군, 도독예주군사로 승진했고 예주자사를 겸임하며 안락향후에 봉해졌습니다.

 

 

 

제갈탄의 난

사마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동생 사마소가 뒤를 이어 위나라의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사마소가 제갈탄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257년 정동대장군 제갈탄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왕기는 진동장군, 도독양예제군사를 대행했습니다. 조정(중앙)에서는 적들의 병사가 정예였기 때문에 수비적인 전술을 펼쳤는데, 왕기는 여러 차례 진격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오나라에서는 제갈탄을 돕기 위해 주이를 원군으로 보냈습니다. 조정에서 지형이 험한 북산을 점거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왕기는 민심이 흔들릴 것을 걱정하며 수춘성의 포위를 더욱 견고히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왕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고 사마소도 진군하여 구두에 주둔했습니다. 왕기는 수춘성 동쪽, 남쪽 두 방향의 군대를 지휘했습니다.

수춘성에서 식량이 떨어져 포위를 돌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왕기는 이를 모두 격파했습니다.

 

결국 수춘성을 함락시킨 사마소는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을 들여보내 투항한 당자의 자제들과 응하여 오나라을 뒤엎으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왕기는 제갈각과 강유의 예를 들며 위험을 경계했습니다. 왕기의 의견을 받아들인 사마소는 진군을 멈췄습니다.

 

왕기는 공을 인정받아 정동장군, 도독양주제군사로 임명되었고 동무후로 봉해졌습니다. 왕기는 부하들에게 공적을 양보했고 장사, 사마 등 일곱 명이 모두 제후가 되었습니다.

 




258년 왕기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기는 아버지 왕표의 유해를 맞아 낙양에 합장시켰습니다.

 

259년 왕기는 정남장군, 도독형주제군사로 전임되었습니다.

 

261년 오나라의 등유 등이 귀순하려고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왕기는 이를 의심했습니다. 왕기의 생각대로 등유 등은 투항하지 않았습니다.

 


죽음

261년 왕기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공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경후로 했습니다. 그의 아들 왕휘가 뒤를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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