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노식 ( ? ~ 192년)
노식은 유주 탁군 탁현 출신으로 자는 자간(子幹)입니다. 그는 신장이 8척 2촌(당시 기준 1척은 약 23.4cm이었기 때문에 약 192cm)으로 큰 키를 가지고 있었고 목소리는 종소리와 같았습니다.
노식은 어린 시절 정현과 함께 마융에게 학문을 배웠습니다. 고금학에 능통했고 연구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마융은 주변에 여자들로 하여금 춤추고 노래하게 했는데 노식은 그녀들에게 잠시 눈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마융은 그런 노식을 보고 그를 예우했습니다.
환제가 죽고 두황후와 그녀의 아버지인 대장군 두무는 유굉(영제)을 황제로 옹립했습니다. 두무는 영세를 황제로 세운 공으로 문희후에 봉해졌는데 노식은 두무에게 글을 올려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상을 사양하고 바르게 행동할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두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노식은 주, 군으로부터 수차례 천거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다가 건녕(168~172)에 박사에 임명되어 출사했습니다.
175년 구강의 만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삼공과 대장군부에서는 노식이 재질과 문무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며 그를 천거했습니다. 노식은 구강태수가 되어 만적들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구강을 평정한 후 노식은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상서장구>, <삼례해고>를 저술하고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유비와 공손찬은 이 시절 노식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후 여강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노식은 여강태수에 임명되어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의랑에 임명된 노식은 간의대부 마일제, 의랑 채옹, 양표, 한설 등과 함께 동관에서 <오경>과 <기전>을 교정하고 <한기>의 속편을 보완하는 일을 했습니다.
178년 일식이 일어나자 노식은 영제에게 당고의 금 사건으로 쫓겨난 이들을 사면하고 관리를 바르게 임용해야 한다고 청했습니다. 하지만 영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황건적의 난
184년 태평도 교주 장각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농민들이 난을 일으킨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노식은 북중랑장에 임명되어 병사들을 이끌고 황건적들을 토벌했습니다. 노식은 연이은 교전에서 승리하며 광종으로 후퇴한 장각을 포위했습니다.
영제는 소황문 좌풍을 보내 상황을 파악하게 했는데 노식의 주위 사람들은 좌풍에게 뇌물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노식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노식이 뇌물을 바치지 않자 좌풍은 노식이 적을 쉽게 격파할 수 있는데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며 시간을 끌고 있다고 모함했습니다. 영제는 좌풍의 말을 듣고 노식을 불러들여 파직했습니다.
거기장군 황보숭이 황건적을 격파하고 자신의 공을 모두 노식에게 돌리면서 노식은 다시 상서로 임명되었습니다.
영제가 죽자 대장군 하진과 하태후는 유변(소제)를 황제로 세웠습니다. 하진은 제후들을 끌어들여 환관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노식은 정태와 함께 이를 반대했지만 하진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십상시의 난으로 하진이 죽고 원소, 원술, 오광 등이 환관들을 공격했습니다.
궁이 혼란한 상황을 틈타 동탁이 권력을 잡게 됩니다. 권력을 잡은 동탁은 폭정을 저지르며 소제(유변)을 폐하고 헌제(유협)을 황제로 세울 뜻을 내비쳤습니다. 동탁을 두려워하던 관료들을 아무도 동탁에게 반대하지 못했는데 노식만 홀로 그에게 반대하며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동탁은 노식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노식과 친한 사이였던 채옹은 동탁의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동탁에게 노식의 일을 말해 그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동탁은 채옹의 말을 듣고 노식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벼슬을 빼앗았습니다.
이후 노식은 상곡에 은거했다가 기주목 원소의 청으로 원소의 군사가 되었습니다.
죽음
192년 노식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노식은 아들에게 검소하게 장례를 지낼 것을 유언했습니다. 노식이 세상을 떠날 때 10살의 나이였던 노육은 나중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노식은 강직하고 굽힘이 없는 성격으로 절개가 있었고 세상을 구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으며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