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관우 ( ? ~ 219년) 유비 조조 유비
관우는 사례 하동군 해현 사람으로 자는 운장(雲長)이며 본래 자는 장생(長生)입니다. 그는 망명해서 유주 탁군으로 도망쳤습니다. 관우가 도망친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관우의 고향은 당시 고가로 판매되던 소금의 생산지였기 때문에 소금에 관련된 사건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습니다.
유비를 만나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유비가 병사를 모을 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유비를 따랐습니다. 유비는 평원상이 되어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임명하고 부곡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습니다. 장비는 관우를 형처럼 대했고 유비, 관우, 장비는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관우, 장비가 유비를 보좌했습니다. 유비, 관우, 장비는 고난과 위험을 함께 했습니다.
194년 도겸이 유비에게 서주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고 공융 등이 유비를 지지하면서 유비는 서주를 다스리게 됩니다. 196년 여포가 찾아와 유비에게 의지하다가 배신하고 서주를 차지하면서 유비는 소패에 머물게 됩니다. 소패에서 유비의 세력이 커지자 여포는 유비를 공격했고 유비는 도망쳐서 조조에게 의지합니다.
조조와의 일화
198년 조조와 유비가 여포를 격파할 때 관우는 조조, 유비와 함께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했습니다. 이때 관우는 조조에게 진희록의 전처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조조에게 부탁했습니다. 조조는 관우가 여러 차례 부탁하자 그녀에게 관심이 생겼고 조조는 그녀를 자신의 측실로 맞이했습니다. 그녀를 빼앗긴 관우는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촉기> 이 때문에 조조는 관우보다 미녀(두씨)를 더 높게 생각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199년 조조에게 의지하던 유비는 그에게서 벗어나 서주자사 차주를 공격해서 해치며 서주를 차지하고 소패로 돌아갔고 관우는 하비성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했습니다. 유비는 손건을 보내 원소와 동맹을 맺었고 조조는 유대, 왕충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지만 유비군은 이들을 격파했습니다.
조조에게 잡히다.
200년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유비를 공격합니다. 유비는 원소에게 도망쳤고 관우는 조조에게 붙잡혔습니다. 조조는 관우를 편장군에 임명하고 예의를 지키며 정중하게 대우했습니다.
원소군의 맹장 안량을 베다.
조조군과 원소군의 전쟁이 시작되고 원소는 안량을 백마로 보내 동군태수 유연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조조는 관우와 장료를 보내 안량을 공격하게 했고 관우는 안량의 휘개(전쟁에 쓰인 수레에 달린 대장기의 덮개)를 보고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베고 수급을 챙겨 돌아왔습니다. 원소군은 백마의 포위를 풀었고 조조는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에 봉했습니다.
조조는 관우의 인품을 높게 생각했고 그가 자신의 밑에서 오래 머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조는 장료에게 관우의 생각을 알아보라고 했고 장료는 관우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관우는 조조의 은혜를 잘 알고 있지만 유비에게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끝까지 머물 수 없다고 했고 반드시 공을 세워 조조에게 보답한 뒤에 떠난다고 말했습니다. 장료는 관우의 얘기를 듣고 혹시 조조가 관우를 죽일까봐 고민하다가 결국 조조에게 말을 전했습니다. 조조는 장료의 말을 듣고 관우를 의롭게 여겼습니다.
조조를 떠나 유비에게 돌아가다.
관우가 안량을 베는 공을 세우자 조조는 관우가 떠날 것이라고 생각해 더욱더 많은 포상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관우는 유비의 소식을 알게 되면서 받은 것들을 남겨두고 조조에게 작별 편지를 남긴 뒤 원소에게 의지하고 있는 유비에게 떠났습니다. 조조의 부하들이 관우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그들을 말렸습니다.
이후 유비는 원소의 곁을 떠나 형주의 유표에게 가서 의했고 관우도 함께 했습니다.
수어지교
208년 유비는 서서가 추천한 제갈량을 군사로 얻기 위해 삼고초려를 행하자 관우와 장비는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유비는 자신이 공명(제갈량)을 얻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수어지교 水魚之交)라며 관우와 장비를 다독였습니다.
장판파, 적벽
유표가 죽은 뒤 조조는 형주를 공격했고 유표의 아들 유종은 항복하고 유비는 도망쳤습니다. 유비는 번에서 남쪽으로 나가 장강을 건너려고 했고 관우는 수백 척의 배를 이끌고 강릉에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유비는 장판에서 조조군에게 추격당했고 한진으로 나아가다 관우의 배와 만나 하구로 갔습니다. 손권은 유비에게 원군을 보내 조조를 막았고 조조는 물러났습니다.
유비군과 손권군이 조조군과 싸운 남군 공방전에서 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해서 공격하고 관우는 북쪽 길을 끊었습니다. 유비는 장강 남쪽의 여러 군을 차지했고 관우를 양양태수 탕구장군으로 임명했습니다.
형주를 맡다.
유비는 익주를 평정하러 가면서 관우를 동독형주사로 임명하고 형주의 수비를 맡겼습니다.
유비는 익주를 평정하고 형주를 지킨 관우의 공적이 장비, 제갈량과 동등하다고 평가되어 군사총독에 임명했습니다.
형주 분쟁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손권은 제갈근을 보내 약속했었던 형주의 일부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유비는 돌려주기를 거부했고 분노한 손권은 장사, 계량, 영릉 세 군을 습격했습니다. 관우는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익양에 포진했고 유비도 대군을 이끌고 관우에게 향했습니다. 전쟁이 커지는 듯 했지만 조조가 한중을 공격하면서 유비는 손권과 화친을 청했고 관우와 노숙이 대담을 나누었습니다. 결국 장사, 강하, 계양은 손권이 남군, 무릉, 영릉은 유비의 땅이 되었습니다.
218년 완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음은 관우와 손을 잡았습니다. 219년 조조군의 조인이 완을 함락하고 후음을 베었습니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의 자리에 오르면서 관우를 전장군에 임명하고 가월절로 삼았습니다.
번성 공방전
219년 유비군이 한중을 공격하면서 관우는 군사를 이끌고 아들 관평과 도독 조루 등과 함께 번성의 조인을 공격했습니다. 조조는 우금에게 칠군을 이끌게 하며 조인의 원군으로 보냈지만 큰 비가 내려 우금군은 수해를 입게 됩니다. 관우는 배를 이끌고 우금군을 공격해서 우금의 항복을 받아냈고 항복하지 않는 방덕을 참수했습니다. 양, 겹, 육혼의 도적들이 관우에게 호응해서 일어났고 관우의 위세는 중원을 흔들었습니다.
조조는 위기를 느껴 수도를 옮길 것을 의논하기도 했습니다. 사마의와 장제는 손권을 설득해 관우의 뒤를 치게 하자는 계책을 조언했습니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였고 손권과 밀약을 맺었습니다.
손권과 관우의 불화
손권이 사자를 보내 자신의 아들과 관우의 딸의 혼인을 청했을 때 관우는 사자를 모욕하며 혼인을 거부했습니다. 손권은 이 사실을 듣고 매우 분노했습니다.
관우가 번성을 포위하고 조인을 공격할 때 손권에게 원군을 요청했는데 손권은 일부로 시간을 끌며 늦장을 부렸고 우금을 붙잡은 관우는 분노해서 “오소리 새끼가 감히 이처럼 구는구나. 번성이 함락되고 나면 내가 네놈들을 멸하지 못하겠느냐!” 라며 손권을 욕했습니다.
조조군과 손권군의 공격을 받다.
관우는 우금의 항복을 받아 3만 명의 포로가 생기면서 식량이 부족해졌고 상관의 곡식을 차지했습니다. 상관은 유비군과 손권군의 경계에 있었고 손권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관우를 공격합니다.
손권군의 여몽은 정예병을 숨긴 배를 상선으로 위장해 은밀하게 관우군의 관측소를 습격하면서 관우군의 정보를 차단했습니다. 손권군이 남군에 도착하자 유비군의 관우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었던 미방과 사인은 손권군에게 항복했습니다.
서황과의 일화
조조는 서황을 조인의 원군으로 보냈고 관우는 조조군과 손권군에게 공격 받게 되었습니다.
서황은 관우와 서로 경애하는 사이로 멀리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군사에 관련된 말이 아닌 일상적인 대화뿐이었습니다.
이후 서황은 말에서 내리며 말했습니다.
서황 “관운장의 머리를 얻어 오는 자는 금 1천근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
관우 “대형, 이 무슨 말이오!”
서황 “이는 나라의 일이오.”
죽음
관우는 여러 차례 상용에 있는 유봉, 맹달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위기에 빠진 관우는 맥성으로 돌아가 농성을 했고 손권은 관우에게 항복을 권하는 사자를 보냈습니다. 관우는 항복을 거절하고 도망치다가 손권군의 반장의 부하 마충에게 붙잡혔습니다.
손권군에게 붙잡힌 관우는 아들 관평과 함께 처형당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손권은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고 조조는 제후의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냈습니다. 관우의 아들은 관평, 관흥이 있었는데 관평은 관우와 함께 죽었고 관흥이 뒤를 이었습니다.
관우의 죽음에 분노한 유비는 오나라를 공격했지만(이릉 전투) 대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관우의 성격과 일화
관우는 무예가 뛰어났고 모든 구절이 입에서 술술 나올 정도로 춘추좌씨전을 좋아했습니다.
관우가 화살에 맞아 왼팔을 관통당한 일이 있었는데 상처는 치유되었지만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에는 늘 뼈가 아팠습니다. 의원에게 진료를 보니 화살촉에 독이 있어 뼈까지 독이 들어갔다며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관우는 장수들과 음식을 먹으며 함께 하고 있었는데 팔을 뻗어 치료를 받았고 술과 고기를 먹으면서 태연하게 담소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관우는 마초가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갈량에게 마초의 인품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제갈량은 호승심이 강한 관우를 생각해 “맹기(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굳세고 기세가 강한 호걸로 익덕(장비)와 말머리를 나란히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는 있지만 염(髥 수염이 인상적이었던 관우를 가리킴) 그대의 출중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라고 답했고 관우는 이 서신을 읽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관우, 장비는 만인지적(만 명을 상대할 만한 용맹이 있다.)이라 칭해진 그 시대의 용맹한 신하였다. 관우는 조공(조조)에게 힘써 보답하고 장비는 의로 엄안을 놓아주었으니 국사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굳세고 자부심이 강하고 장비는 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은 점이 있어 실패하게 되었으니 이치상 있는 일이다.’ 라고 평했습니다.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 관우는 유비, 장비와 함께 도원결의를 맺고 의형제가 됩니다.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 동탁의 수하인 화웅을 술이 식기 전에 베어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장료의 권유로 유비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조조에게 항복하고 적토마를 받고 조조의 밑에 있으면서 원소군의 맹장 안량과 문추를 베기도 합니다.
조조를 떠나면서 다섯 관문에서 6명의 장수를 벤 오관육참의 설화가 전해지기도 하고 적벽 대전에서 대패하고 도망치는 조조를 놓아주기도 합니다.
화타에게 뼈를 긁어내는 치료를 받으며 아무렇지 않게 마량과 바둑을 두기도 합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장남 관평이 양자로 나오고 관색이 셋째 아들로 나옵니다. (관색은 가상의 인물)
관우는 조인을 공격하다가 오나라의 공격을 받고 붙잡혀 참수를 당합니다.
관우가 죽은 뒤에는 여몽, 조조에게 망령이 나타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