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 공융

삼국지 공융 (153년 ~ 208후한 말

 

공융은 예주 노국 사람으로 자는 문거(文擧)입니다아버지 공주는 태산도위를 역임했고 형은 공포이고 칠형제 중 여섯 번째 아들입니다공융은 공자의 후예로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해 여러 가지 책을 읽었습니다.


 



이응과의 일화

공융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낙양으로 올라가서 당시 명성이 매우 높았던 하남윤 이응의 집을 찾아갔습니다공융은 이응이라는 사람을 알고 싶어서 이응의 문도가 되려고 했습니다이응의 집에 도착한 공융은 문지기에게 나는 이군의 가문과 통했던 사람의 자손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이응 – 고명하신 조상님께서 일찍이 나와 교제를 하신 적이 있는가?

공융 – 그렇습니다저의 선군이신 공자와 군의 조상이신 이노군께서는 덕과 의를 나란히 하셨으며함께 사우로 지내셨습니다그러니 저 공융의 가문과 이군의 가문은 대대로 통하는 집안이었습니다.

 

대화를 듣던 사람들은 모두 공융을 기이하고 총명한 동자라고 생각했고 나중에 태중대부 진위가 와서 이들의 대화 내용을 듣고 말했습니다.


진위 – 어렸을 때 영리하다고 커서까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공융 – 말씀을 듣고 보니 군께서도 어렸을 때 총명하셨겠습니다.

 

이응은 크게 웃으며 공융이 고명하고 장대하니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공융은 13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매우 슬픔에 빠졌습니다삼년상을 치르면서 야윈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공융의 효심을 칭찬하고 감동했습니다.

 


장검과의 일화

공융이 16세일 때 공융의 형의 지인인 장검은 당시 권력자였던 중상시 후람의 비리를 고발했다가 원한을 사고 쫒기는 신세가 되어 공포에게 찾아왔습니다장검이 찾아왔을 때 공포는 자리에 없고 공융만 자리에 있었고 장검은 공융이 어리다고 생각해 사정을 얘기하지 않고 떠나려 했습니다.

 

공융은 난처해하는 장검의 모습을 보며 장검을 숨겨주었고 나중에 일이 발각되어 장검은 도망치고 공융과 형 공포는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누가 죄가 있는지 밝히는 자리에서 공융은 자신이 죄인을 받아들이고 숨겼다고 하며 자신이 죄가 있다고 했고 공포는 장검이 자신에게 의지하러 찾아온 것이라며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공융의 어머니는 집안일은 어른인 자신에게 책임이 있으니 자신이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관리는 난감해하며 판결을 하지 못했고 조정에 일을 보고합니다조정에서는 공포에게 죄를 물어 처형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공포는 사형을 당하고 맙니다이 일로 공융의 이름은 널리 퍼지게 됩니다.

 

이후 공융은 사도 양사의 추천으로 사도부의 속관으로 지내며 환관과 친족들의 비리를 적발했습니다공융은 십상시를 비판한 청의파 선비로 유명했고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노식의 부장으로 활약했습니다.

 


북해

동탁이 권력을 잡았을 때 황건적이 여러 주에서 다시 일어나고 동탁은 바른말을 해서 껄끄럽게 생각했던 공융을 북해국의 상으로 임명합니다북해는 황건적의 침입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공융은 백성들을 수습하고 군사를 모아 훈련시켜 황건적을 몰아내고 통치에 힘썼습니다.

 

이후 황건적이 다시 쳐들어와 관해에게 포위당해 위기에 빠졌지만 다행히 태자자의 도움으로 당시 평원에 있던 유비에게 도움을 청해 유비의 도움으로 관해를 격파하고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서주자사 도겸이 죽고 유비에게 뒤를 부탁했을 때 망설이던 유비를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허도

원소의 세력 확장으로 공융은 원소의 아들 원담과 싸움을 벌이다가 패배하고 허도(허창)으로 도망칩니다허도에서 장작대장소부태중태부에 임명되고 조정에서 일하게 됩니다건안칠자의 한 사람으로 불리며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순욱

공융과 순욱이 평가한 안량과 문추의 얘기가 있는데 순욱은 안량과 문추를 필부의 용맹을 가진 장수라며 과소평가했고 공융은 삼군을 이끌만한 장수라며 칭찬했습니다.

 


조조

공융은 당시 권력자였던 조조와 대립하고 비판하는 일이 많았습니다정론으로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가 섞인 내용으로 조조를 비판하는 일도 있었고 조조는 이런 공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용인하는 척 했습니다.

 


죽음

결국 공융은 조조가 남방원정을 앞두었을 때 그를 비판하다가 손권의 사자에게 조조를 모략했다는 죄로 붙잡혀 가족들과 함께 처형을 당하고 맙니다조조의 뒤를 이은 조비는 공융의 시문을 좋아해서 공융의 문장을 가져오면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후한서>

공융은 남의 선행을 들었을 때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고사람들의 의견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부연 설명을 들어 완성시켰다앞에서는 상대의 단점을 지적하지만 뒤에서는 상대의 장점을 칭찬했고 현명한 사람들을 추천해 출세시켰다선한 사람을 추천 했는데 잘 되지 않았을 때는 자신의 잘못과 같이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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