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감녕 ( ? ~ ? ) 오나라
감녕은 익주 파군 임강현 사람으로 자는 흥패(興覇)입니다. 계연으로 천거되어 촉군승(군을 다스리는 태수의 업무를 보좌하는 관직)으로 지내다가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기개가 있는 협객으로 불량한 이들을 모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깃털 장식에 방울을 달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방울 소리만 듣고도 감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감녕 일당은 육로와 수로를 활보하면서 범죄가 일어나면 체포와 처벌을 했고 관리들에게도 후하게 대접받고 대접하지 않는 관리들에게 보복을 하기도 했습니다. 좋게 말하면 협객 나쁘게 말하면 깡패 노릇을 하다가 책을 가까이 하면서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유표
이후 두 가지의 기록이 있는데 첫 번째는 부하들을 데리고 형주의 유표에게 갔다는 기록이고 두 번째는 194년 유언이 죽고 아들 유장이 뒤를 이었을 때 익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유장에게 패하고 형주의 유표에게로 도망쳤다는 기록입니다.
감녕은 유표에게 의지해서 남양에 살게 되었는데 유표는 감녕을 중용하지 않았고 감녕도 유표가 학문은 뛰어나지만 군사업무는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감녕은 강동으로 이주하려고 시도했지만 강하태수 황조의 군대가 하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황조의 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황조
하지만 황조도 감녕을 중용하지 않았습니다. 3년이 지난 후 황조와 손권의 싸움에서 황조가 패하면서 추격을 받고 위기에 빠졌을 때 감녕은 추격하던 능조를 죽이며 공을 세웠지만 황조의 대우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황조의 부하 소비는 감녕을 중요하도록 조언했지만 황조는 오히려 감녕을 견제해 감녕의 부하들을 유혹해 부하로 삼거나 떠나가게 했습니다. 감녕은 처지를 한탄하고 괴로워하며 지냈는데 소비가 감녕을 주의 현장으로 삼아 원하면 다른 곳으로 가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감녕은 남은 부하들과 새롭게 부하가 된 자들을 포함해 수백 명을 이끌고 손권에게 투항해 버립니다.
손권
여몽과 주유의 추천으로 손권은 감녕을 받아들입니다. 감녕은 손권에게 황조와 유표를 치고 형주를 차지하고 난 뒤 익주까지 차지하는 전략을 제안했고 장소는 이를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감녕의 반론으로 손권은 감녕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소비에게 은혜를 갚다
208년 감녕은 손권군이 황조를 공격하는데 함께 했습니다. 황조를 격파하고 은인인 소비가 처형당할 위기에 빠지자 감녕은 손권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으며 소비를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결국 손권은 소비를 살려주어 감녕은 옛 은혜를 갚게 되었습니다.
황조의 군을 흡수한 손권은 감녕에게 병사를 주고 당구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적벽, 남군
손권과 조조가 적벽에서 싸울 때 감녕은 주유를 따라 오림에서 조조를 격파했고 남군의 조인과 싸웠습니다. 감녕은 먼저 이릉을 차지하려는 계략을 세우고 이릉성을 함락시키지만 조인이 원군을 보내서 몇 배나 되는 적군에게 포위당하는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감녕은 조인군의 공격을 견디며 주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주유는 여몽의 조언을 받아들여 능통에게 수비를 맡기고 감녕을 구했습니다.
관우를 막아내다
동맹관계를 맺고있던 손권과 유비는 형주 반환의 문제로 대립을 하게 됩니다. 감녕은 노숙을 따라 장사와 익양을 수비하며 관우와 대치했습니다. 관우는 3만의 병사들 중 정예 5천을 골라 밤을 틈타 강을 건너려고 했습니다. 감녕은 노숙에게 병사 500명을 더 요청하며 관우를 막겠다고 나섰고 노숙은 1천의 병사를 맡겼습니다. 감녕은 밤중에 출진해 관우가 강을 건너지 못하게 막았고 손권은 감녕을 칭찬하며 서릉태수로 임명했습니다.
그 때 관우가 건너편에서 만든 진영을 관우뢰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환성 전투
손권군이 조조의 환성을 공격할 때 여몽은 감녕을 승성독(공성대장)에 임명합니다. 감녕을 성벽을 기어 올라서 병사들을 제압하고 적장인 주광을 포로로 잡았고 공은 인정받아 절충장군으로 승진합니다.
합비 공방전 소요진 전투
손권은 조조군의 합비를 공격하다가 군대에 역병이 돌면서 퇴각을 결정했습니다. 손권은 다른 병사들을 퇴각시키고 여몽, 장흠, 감녕, 능통과 적은 병사들만 데리고 있다가 장료에게 습격을 당해 위기에 빠집니다. 감녕은 분전하며 능통과 함께 활약했고 군악대에게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며 사기를 올렸습니다. 이들의 활약으로 손권은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유수구 전투
조조가 손권군의 유수로 쳐들어왔을 때 감녕은 손권에게 100명을 모아 야습을 할 것을 제안합니다. 감녕은 두려워하는 부하들에게 사기를 북돋아주며 야습에 성공했고 손권은 ‘맹덕(조조)에게는 장료가 있지만 나에게는 감녕이 있다’ 라며 감녕을 칭찬했습니다.
능통
감녕은 예전에 능조를 죽인 일로 능조의 아들 능통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손권은 이 것을 눈치 채고 감녕과 능통을 중재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여몽과의 일화
감녕의 요리사가 실수를 하고 여몽에게 도망칩니다. 여몽은 감녕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리사를 죽이지 말라고 하며 돌려보냈습니다. 감녕은 요리사를 죽이고 말았고 여몽은 화가 나서 감녕을 처벌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몽의 어머니가 ‘천하가 어지러운데 집안싸움을 할 때가 아니다’라며 말리면서 여몽은 생각을 고쳤고 감녕은 눈물을 흘리며 여몽에게 사과했습니다.
죽음
감녕이 죽은 시기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건강실록에 215년 겨울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다른 기록들과 일치하지 않아 확실하지 않습니다. 감녕이 세상을 떠나고 손권은 매우 슬퍼했고 감녕의 아들 감괴는 나중에 죄를 범해 회계에 유배되었다가 병사했습니다. 다른 아들은 감술이 있었습니다.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 감녕은 젊었을 대 금범적이라고 불렸고 손권이 조조와 싸움을 고민할 때 싸우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금범 – 비단으로 만든 돛
능통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원수인 감녕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악진에게 위기에 빠진 능통을 감녕이 구해주면서 화해를 하게 됩니다.
유비가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를 친 이릉 전투에서 감녕은 병에 걸린 몸을 이끌고 전장에 나섰다가 사마가의 활을 맞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감녕은 난폭한 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용맹하고 군략에 뛰어났습니다. 오나라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손권은 그를 장료와 비교하기도 했고 삼국지에 관련 된 게임, 만화 등에서는 항상 오나라 최고의 무장으로 표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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