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 우금

삼국지 우금 (? ~ 221

 

우금은 연주 태산군 거평현 사람으로 자는 문칙(文則)입니다우금은 황건적의 난 때 같은 고향 출신의 기도위 포신이 의병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그와 함께 했습니다. 192년 연주를 침입한 청주의 황건적과 싸우다가 포신이 전사하고 이후 우금은 왕랑의 밑에서 도백을 맡게 됩니다.




 

왕랑은 우금의 능력이 대장군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높이 평가하며 그를 추천했습니다조조는 우금과 대화을 나누고 그를 군사마로 임명합니다우금은 서주의 도겸이 다스리고 있던 광위를 공격해 함락시키며 함진도위로 승진하게 됩니다.

 

조조가 연주에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장막장초 형제가 여포를 끌어들여 난을 일으켰을 때 복양수창수장정도이고옹구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고 고아장초를 격파하며 연주 탈환에 공을 세웠습니다.

 

196년 조조가 황건적의 잔당 황소유벽을 토벌할 때 우금이 함께하며 황소 등을 격파하며 공을 세워 평로교위로 승진했습니다또 원술군과 싸울 때 교유 등 4명의 장수를 무찔렀습니다.

 


청주병과의 일화

197년 조조가 장수를 치러 갈 때 장수는 겁을 먹고 항복했다가 가후의 계락으로 조조군을 공격해 조조군은 타격을 받고 퇴각했습니다우금은 수백의 군사를 이끌고 싸우며 퇴각하다가 같은 조조군의 청주병(청주의 황건적들이 항복해서 들어온 조조군)이 약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금은 약탈하는 청주병을 공격했고 청주병들은 조조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우금은 변명하는 것보다 적을 막는 진영을 설치하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했고 진영을 설치한 뒤 조조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조조는 굳은 신념을 가진 우금을 옛 명장만큼 뛰어나다며 칭찬했습니다.

 

우금은 198년 조조가 다시 장수를 공격할 때하비에서 여포를 격파할 때 함께했고 199년 사환조인과 함께 사견에서 수고를 격파했습니다.

 

조조와 원소의 싸움

조조가 원소와 싸울 때 우금은 2천의 병사를 이끌고 연진을 수비했습니다. 200년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면서 조조는 유비를 토벌하러 갔고 우금은 그 사이 원소군의 공격을 견고하게 막아냈습니다.

조조군이 백마에서 원소군과 싸울 때 우금은 악진과 함께 5천의 병사를 이끌고 연진의 남쪽에 있는 원소군을 공격해 30여 곳의 별진을 불사르고 하무황마 등 20여 명의 장수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이후 우금은 원무에 주둔하며 두씨진에서 원소의 진을 공격했고 비장군으로 승진했습니다.

관도에서 조조군은 토산을 쌓아 원소와 대치했는데 조조군이 밀리며 상황이 불리해졌습니다우금은 토산을 맡아 지키며 활약하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올렸고 결국 조조군이 승리하면서 우금은 편장군으로 임명되었습니다.

 

202년 조조가 원소의 아들 원담원상와 겨루는 동안 형주의 유표에게 의지하고 있던 유비가 섭현을 공격했습니다우금은 하후돈이전과 함께 유비군을 막으러 갔습니다유비군은 진지를 불태우고 박망으로 퇴각했고 이전이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하후돈과 우금이 뒤를 쫒았다가 복병에 당하고 말았습니다진영에 남아있던 이전이 구하러 오면서 유비군은 물러나게 됩니다.


 

 

 



창희와의 일화

조조에게 항복했었던 동해군의 창희가 206년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우금은 장패하후연과 같이 창희를 토벌했습니다창희는 우금이 옛 친구였기 때문에 우금에게 항복했지만 우금은 포위한 뒤에 항복한 자는 사면해 주지 않는 것이 법령이라며 눈물을 흘리며 창희를 처형했습니다조조는 창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우금의 판단을 칭찬했습니다동해가 평정되고 우금은 호위장군으로 임명됩니다.

 

209년 육안에서 진란과 매성이 들고 일어나면서 우금장패는 매성을 맡고 장료장합은 진란을 맡았습니다매성은 우금과 장패에게 거짓으로 항복했다가 다시 진란과 합류했습니다장료군은 군량이 부족해지는 상황에 빠졌는데 우금이 군량을 맡아 지원해주며 결국 진란매성을 토벌했습니다.

 

우금은 장료악진장합서황과 함게 조조군의 명장으로 칭송받으며 번갈아가며 전쟁할 때 선봉을 맡고 군을 물릴 때는 배후를 지켰습니다우금은 공적을 인정받아 좌장군의 자리에 오르며 조조군의 무관 중에서 높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관우에게 항복하다

219년 형주 공방전 때 유비군의 관우는 양양을 점령하고 조인이 지키고 있는 번성을 포위했습니다조조는 우금과 7군을 함께 조인을 도우러 보냈습니다많은 비가 오면서 한수가 범람해 우금군이 피해를 받게 되고 결국 큰 배를 타고 공격해 온 관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맙니다.

방덕은 의지를 굽히지 않고 참수당하고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해서 목숨을 건졌습니다우금의 항복 소식을 들은 조조는 30년을 알고 지낸 우금이 방덕에 못 미치는 행동을 할 줄 몰랐다며 탄식했습니다.

 

관우군은 많은 포로들로 군량이 부족해졌고 손권에 속해있던 상관의 식량을 취하게 됩니다여몽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형주를 공격했고 강릉을 점령하면서 우금은 오나라에 인계됩니다손권은 우금을 후하게 대접했지만 손권의 수하 우번은 항복한 우번을 비난했습니다.

 

우번은 우금을 충의를 관철하지 않는 사람의 본보기로 삼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손권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220년 조조가 죽으면서 조비가 뒤를 잇고 221년 황제에 오르면서 손권은 우금을 위나라로 돌려보냅니다.

 


죽음

우금은 수염과 머리가 백발이 되고 많이 수척해진 상태로 조비를 만나게 되고 조비는 우금을 위로하면서 안원장군으로 임명했습니다이후 우금을 오나라로 가는 사자로 임명한다고 하며 조조의 묘를 참배하도록 했습니다조조의 묘에는 조비가 그리게 그림이 있었는데 관우에게 잡인 방덕은 고개를 들고 명예를 지키고 있었고 우금은 구차한 모습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내용의 그림이었습니다우금은 그 그림을 보고 부끄럽고 분한 마음에 병에 걸려 쓰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우금의 뒤는 아들 우규가 이었고 우금은 죽고 난 후에도 여(죄 없는 자를 살육하다)라는 시호를 받고 말았습니다.

 


평가

우금은 강직하고 위엄이 있었고 적의 재물도 사사로이 취하지 않아 청렴했습니다하지만 법률을 너무 중시하는 면이 있어 병사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고 합니다왕랑은 우금을 조조에 추천할 때 대장군을 맡을 능력이 있다고 했고 청주병 일화로 굳은 신념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조조 휘하의 훌륭한 장수로 장료악진우금장합서황 5명이 으뜸이라고 하며 우금은 굳세면서 엄중하다고 했지만 그 명성을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다고 했습니다조조의 밑에서 수많은 공을 세우며 활약했던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하면서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며 아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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