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손책 (175년 ~ 200년) 후한 말
손책은 양주 오군 부춘현 사람으로 자는 백부(伯符)입니다. 손채의 아버지는 손견, 어머니는 오국태, 동생은 오나라를 세운 손권입니다. 아버지 손견이 의병을 일을 켰을 때 손책은 어머니와 함께 여강군 서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손책은 주유와 친구가 되고 어린 시절부터 명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손견이 죽으면서 손책은 고향인 오군 곡아현에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장례가 끝난 후 강을 건너 광릉군 강도현에 살았지만 서주목 도겸이 자신을 반겨주지 않자 다시 곡아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외숙부인 단양태수 오경을 찾아가 수백 명의 군사를 얻게 됩니다.
194년 손책은 원술의 밑으로 들어갑니다. 원술은 손책을 뛰어나다 여기고 옛 손견의 부곡을 손책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손책은 원술의 장수인 교유, 장훈에게 존경받았고 원술도 손책같은 자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원술은 예전에 손책에게 구강태수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가 말을 바꾸어 단양의 진기를 구강태수로 임명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유비와 싸우기 전에 여강태수 육강에게 군량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고 분노해 손책에게 육강을 치면 여강태수 자리를 준다고 약속합니다. 손책은 예전에 육강을 찾아갔을 때 직접 만나주지 않고 부하를 시켜 만나게 해서 자존심이 상해있던 터라 이를 승낙하고 육강을 공격해 격파합니다. 하지만 원술을 또 말을 바꾸고 유훈을 여강태수로 임명합니다.
손책은 원술 밑에 있다가는 큰일을 이룰 수 없다고 느끼고 독립하기로 결심합니다.
유요와 전쟁
양주자사 유요는 단양도위 손분과 단양태수 오경을 쫒아내고 원술과 전쟁을 시작합니다. 유요는 장영을 당리구로, 번능과 우미를 횡강진으로 보내 원술을 견제했습니다. 원술은 손분과 오경에게 병사를 주며 유요를 치게 했지만 1년이 지나도록 이기지 못했습니다.
손책은 원술을 설득해 참전하기로 하고 절충교위에 임명됩니다. 손책이 출발할 때 병사는 천여 명이었지만 역양에 도착한 뒤에는 5, 6천 명이었습니다. 손책은 오경, 손분과 함께 번능, 우미를 무찌르고 선곤 어머니의 계책을 받아들여 당리구의 장영까지 격파했습니다.
195년 유요의 진영이 있는 우저를 공격해 군수품과 군량을 얻고 말릉성을 공격했습니다. 손책은 공방 중에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후퇴하면 자신이 죽었다고 속이며 함정을 팠고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피해를 입은 착융은 성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고 손책은 공격 방향을 돌려 해릉에서 유요의 별장을 격파하고 호숙과 강승을 공격해 항복시킵니다.
유요는 군대를 버리고 달아났고 다른 여러 군의 태수들도 성곽을 부수고 달아났습니다. 유요밑에 있던 태사자는 저항하다가 손책에게 잡혀 투항하게 됩니다.
왕랑을 치다
손책은 주유에게 단양을 맡기고 주치에게 오군을 평정하게 하고 자신은 회계의 왕랑을 공격했습니다. 처음에는 왕랑이 수비를 성공했지만 손책의 숙부 손정의 조언으로 사독 길로 돌아가 고천둔을 습격합니다. 왕랑은 주흔에게 방어를 맡겼지만 손책은 주흔을 격파합니다. 왕랑은 패배하고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동야까지 갔는데 손책은 동야까지 추격해 왕랑군을 격파하고 왕랑을 쫒아내면서 회계를 평정했습니다.
손책이 회계를 평정하고 오군으로 갔을 때 주치가 오군태수 허공을 격파해 허공은 호족 엄백호에게 의지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엄백호는 동생 엄여를 보내 손책과 화의를 요청했는데 손책은 창으로 엄여를 해치웁니다. 엄백호는 두려워하며 허소에게 도망가 의지했고 손책은 허소(허자장)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원술과 절교하다
원술이 황제를 칭하자 손책은 이에 반대했고 서곤에게 원술이 임명한 단양태수 원윤을 공격하게 하며 쫒아냈습니다. 손책은 원술에게 꾸짖는 편지를 보내고 절교했습니다. 손책은 조조가 모시고 있던 헌제에게 관직을 받으며 조조와 원술이 싸울 때 조조를 돕기도 했습니다.
강동 평정
199년 원술이 죽고 유훈이 원술의 잔당을 흡수하면서 세력이 커집니다. 손책은 유훈에게 거짓으로 동맹을 맺는 척하고 상료를 공격해 달라고 했습니다. 유훈은 속아서 상료를 공격하러 갔지만 실패했고 손책과 주유는 유훈의 본거지 환성을 공격해서 점령하고 원술의 유족과 유훈의 처자식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곳에서 유명한 미녀들인 강동이교 대교, 소교를 만나 손책은 대교와 주유는 소교와 맺어집니다.
손분, 손보는 회군하는 유훈을 공격해 격파했고 유훈은 황조에게 도움을 요청해 황조는 아들 황역을 보내 유훈을 돕게 합니다. 손책은 황역이 오기전에 유훈을 격파했고 유훈은 조조에게 달아나고 황역도 돌아갑니다. 손책은 황조를 공격하고 황조의 선봉이었던 유호, 한희를 격파합니다. 황조와 유훈을 격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예장태수 화흠을 받아들였습니다. 손책은 강동을 평정하고 자신은 회계태수에 오르고, 주치를 오군태수. 오경을 단양태수, 사촌 손분을 예장태수, 손분의 동생 소보를 노릉태수로 임명했습니다.
죽음
200년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 할 때 손책은 허창(허도)를 급습해 헌제를 옹립하려고 했습니다. 군을 이끌고 북상하면서 광릉 태수 진등과 대치했습니다.
허공이 헌제에게 보내는 밀서를 발견한 부하가 손책에게 밀서를 보여줬습니다. 밀서는 손책이 항우와 같은 무예와 인격을 지닌 위험한 인물이라서 참수나 인질로 잡아야 한다는 내용이었고 손책은 허공을 참수합니다. 허공의 죽음으로 복수심을 가진 허공의 식객 허소는 손책이 홀로 사냥을 나갔을 때 습격해 손책에게 중상을 입히고 죽었습니다. 정보가 달려와 손책을 데리고 가서 치료받게 했습니다.
중상을 입은 손책은 손권을 불러 ‘강동의 병력을 이끌어 결단을 내려 천하의 영웅들과 다투는 것은 너가 나만 못하지만, 현인을 선발하고 능력있는 자를 등용하여 강동을 지키는 것은 내가 너만 못하다.’ 라는 말을 했고 이후 밤에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손책이 죽은 뒤 동생 손권이 뒤를 이었고 손권은 나중에 제위에 오르고 손책을 장사환왕으로 추존(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했습니다. 손책의 아들은 손소가 있었고 손책의 손자는 손봉입니다.
소패왕
손책은 어린 나이에 강동을 평정하면서 항우와 비교되며 소패왕(小覇王)이라고 불렸습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손책을 걸출한 영기를 갖추어 그 용맹함과 민첩함을 그의 장점으로 꼽으면서, 손책이 뛰어난 인물을 등용해 중원을 넘볼 뜻을 품었으나, 경솔함과 성급함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망쳤다고 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