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 곽회

삼국지 곽회

 

곽회는 태원군 양곡현 출신으로 자는 백제(伯濟)입니다. 곽회의 할아버지는 대사농을 지낸 곽전이고, 곽회의 아버지는 안문태수를 지난 곽온입니다.

 

건안 연간 효렴으로 천거되어 평원현의 현승이 되었다가 오관중랑장이 된 조비 밑에서 도국을 다루는 일인 문하적조로 일했습니다.



한중

215년 곽회는 승상 조조의 병조의령사로 전임되어 한중 정벌에 함께 했습니다.


조조는 한중에서 돌아올 때 하후연을 남겨 유비를 견제하게 했고, 곽회는 하후연의 사마가 되어 한중에 남았습니다. 유비와 하후연의 싸움에서 곽회는 질병이 있어 출병하지 못했습니다.

 

하후연이 유비군과의 싸움에서 세상을 떠난 후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곽회는 장합을 도와 병사들을 추스르고 진영을 안정시켰습니다.

 

 

유비군이 한수를 건너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회의가 열렸습니다. 대부분의 장수들은 유비군의 기세가 강하니 물에 의지하여 진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곽회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적을 꺾기에 모자랍니다. 물에서 떨어진 곳에 진을 쳐서 적을 유인한 후 절반 쯤 건넜을 때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유비군은 상대가 물에서 떨어진 곳에 진을 치자 의심스럽게 생각하며 건너지 않았습니다. 상황을 보고받은 조조는 곽회를 칭찬했습니다. 장합에게 임시로 부절을 주고, 곽회를 사마로 임명했습니다.

 


조비 

조조가 세상을 떠나고 조조의 아들 조비가 뒤를 이었습니다.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곽회는 관내후의 작위를 받고 진서장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정강호군을 대행하며 장합과 함께 노수에서 반란을 일으킨 산적 정강 무리를 토벌했습니다.

 

조비가 헌제에게 황제의 자리를 선양받았습니다. 축하하러 나선 길에 질병에 걸리고 만 곽회는 거리를 계산하며 요양에 힘썼습니다. 곽회가 입궐했을 때는 연회가 열려 있습니다.

 

조비 옛날 우가 도산으로 제후들을 모이게 했을 때 방풍이 나중에 도착하자 사형에 처했소. 하늘이 함께 축하하는 자리에 그대는 가장 늦게 왔으니 무엇 때문인가?”

 

곽회 오제는 교화를 우선으로 하여 백성들을 덕으로 지도하였고, 하후의 정치가 쇠미해지자 형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신은 당우의 시대를 만나 스스로 방풍의 죽음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곽회의 재치 있는 대답에 감탄한 조비는 그를 칭찬하며 옹주자사를 겸하게 했습니다.

 

 

촉나라와 이민족

안정의 강족인 대사 벽제가 반란을 일으키자 곽회는 그를 토벌하고 투항하게 했습니다.

곽회는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면 사람을 보내 그들의 정보를 파악한 후 면회하여 마음을 이끌었습니다. 사람들은 곽회를 신명이라고 불렀습니다.

 

 

228년 촉나라의 제갈량이 기산에서 나와 마속을 기산으로 파견하고, 고상을 열유성에 주둔하도록 했습니다. 위나라에서는 장합이 마속을 상대했고, 곽회가 고상을 상대하며 모두 격파했습니다. 농서의 유명한 강족 당제를 포한에서 격파한 곽회는 건위장군의 직위를 더했습니다.

 


229년 촉나라의 진식이 무도와 음평을 공격했습니다. 곽회가 요격에 나섰지만 제갈량이 직접 나서 건위로 출진하면서 패배하여 무도와 음평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230년 촉나라의 위연과 오의는 강중을 공격했습니다. 위나라의 곽회와 비요가 요격에 나섰지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231년 촉나라가 노성을 공격했습니다. 조진을 대신해 사마의가 지휘관이 되었고 곽회, 대릉, 비요가 상규에서 제갈량을 요격하려 했지만 패배했습니다. 당시 농우에는 식량이 없어 군량이 부족했는데 관중에서 수송해오도록 상의했습니다. 곽회는 이민족을 어루만지며 곡식을 내게 하고 수송 노역을 할당했습니다. 공을 인정받아 양무장군에 임명되었습니다.

 


234년 촉나라의 제갈량이 사곡에서 공격하러 나와 난항에서 둔적을 했습니다. 위나라의 사마의는 위남에 주군하고 있었습니다. 곽회는 제갈량이 장안 방면으로 통하는 북원을 노릴 것이니 미리 선점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장수들이 동감하지 않지 곽회가 말했습니다.

 

곽회 만약 제갈량이 위수를 넘어 고원으로 올라와 병사들을 북산에 이어서 농으로 가는 길을 끊어버리고 백성과 이민족을 동요시킨다면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사마의는 곽회의 의견을 따라 곽회를 북원에 주둔시켰습니다. 준비가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촉나라군이 공격해왔지만 곽회는 그들에게 맞섰습니다.


제갈량은 병력을 과시하며 서쪽으로 진군했습니다. 장수들은 제갈량이 서위를 노리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곽회는 제갈량이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라며 실제로는 양수를 공격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곽회의 예상대로 촉군이 양수를 공격했는데 미리 대비하고 있던 위군은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촉나라와 이민족

240년 촉나라의 강유가 농서로 진격했습니다. 곽회는 강유에게 대항하며 강중까지 추격했고 강유는 물어났습니다. 곽회는 강족 미당 들을 토벌하고, 저족 3천 부락을 회유하고 이주시키며 공을 세워 좌장군으로 승진했습니다.

 

양주의 이민족들이 옹주로 귀속하자 곽회는 상주를 올려 그들은 안정군의 고평에서 거주하도록 하여 주민이 되게 했습니다. 전장군으로 임명되어 옹주를 관리했습니다.

 


244년 위나라의 조상이 촉을 공격했고 곽회는 선봉이 되었습니다. 위군의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곽회는 즉시 군을 돌려 탈출했고 크게 패배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246년 촉나라의 강유가 농서로 진군했습니다. 위나라에서 곽회와 하후패가 나섰지만 패배했습니다.

 


247년 농서, 남안, 금성, 서평의 강족들인 아하, 소과, 벌동, 아차새 등이 서로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촉나라의 강유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그들에게 호응했습니다.

하후패는 위시에 주둔했습니다. 곽회는 강유가 하후패를 공격해올 것이라고 생각해 풍중으로 들어가 남족으로 방향을 바꿔 하후패에게 향했습니다. 곽회의 예상대로 강유는 위시를 공격했습니다. 곽회군을 만난 강유는 퇴각했습니다.

곽회는 반란을 일으킨 이들을 토벌하고 아하, 소과를 베었습니다. 항복한 자가 1만여 부락이나 되었습니다.

 


248년 아차새 등은 하과, 백토의 옛 성에 주둔하며 황하를 거점으로 위군에게 대항했습니다. 곽회는 상류의 형세를 보고 은밀하게 하류로 군대를 건너게 하여 상대를 크게 격파했습니다.

치무대가 무위를 포위했지만 그들의 가족들은 서해에 남아있었습니다. 곽회는 서해로 진군했는데 마침 돌아오는 치무대(강족의 수령)와 만나 교전하여 격파햇습니다.

 

석두산의 서쪽에 있는 영거가 큰 길을 끊고 사신이 왕래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곽회는 돌아가면서 그들을 격파했습니다.

 

강유는 치무대를 맞이하고, 요화를 석중산에 남겨 성을 쌓게 했습니다. 패배한 강족들은 거두어 인질로 삼았습니다. 곽회는 군대를 분산해 그들을 취하려 했는데, 장수들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곽회는 요화를 공격해 강유가 이를 구원하려하면 호인과 촉나라 연합은 자연스럽게 끊어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곽회는 하후패를 파견하여 강유를 추격하게 하고, 직접 군을 이끌고 요화를 공격했습니다. 곽회의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가며 침공을 막아냈고 공을 인정받아 도향후로 봉해졌습니다.

 


249년 곽회는 도독옹양제군사로 승진했습니다. 옹주자사 진태와 함게 계책을 세워 촉나라의 구안 등을 항복하게 했습니다.

 


25030여 년 동안 관중에서 이민족과 촉나라를 상대한 곽회는 거기장군, 의동삼사로 승진하고 양고후로 봉해졌습니다.

 


곽회의 아내

곽회의 아내은 왕릉의 누나였는데, 왕릉이 죄를 지어 곽회의 부인가지 연좌를 받게 될 위기에 빠졌습니다. 시어사가 곽회의 아내를 체포하러 오자 수하들은 곽회에게 아내를 놓아달라는 상주문을 올리라고 청했습니다. 하지만 곽회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곽회의 부인이 압송되자 다섯 아들이 머리를 찧어 피를 흘리며 곽회에게 구원을 청했습니다. 마음이 돌아선 곽회는 결국 허락했고 기병이 추격하여 부인을 다시 데려왔습니다.

 

곽회는 사마의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곽회 - 다섯 아들이 어미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으니, 만약 어미가 세상을 떠난다면 다섯 아들은 살 수 없을 것이고, 다섯 아들이 세상을 떠나다면 저 또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부인을 다시 데려온 것은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니 군주로부터 죄를 받음이 마땅합니다.

 

서신을 받은 사마의는 곽회의 부인을 사면했습니다.

 

 

죽음

255년 곽회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장군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를 정후로 했습니다. 그의 아들 곽통이 뒤를 이었습니다.

 


삼국지연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곽회는 한중 공방전에서 조홍의 수하로 등장합니다. 연패에 책임을 지고 처형당할 위기에 빠진 장합을 구해줍니다.

 

제갈량의 북벌에서 조진과 사마의를 도와 촉군과 싸웠습니다. 이후 포위된 사마소를 구하려다가 강유의 화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평가

곽회의 계책은 정밀하고 상세했으며, 진과 옹 일대에 명성과 인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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