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 맹달

삼국지 맹달

 

맹달은 사례 우풍현 출신으로 후한 양주자사를 지냈던 맹타의 아들입니다. 원래 자는 자경(子敬)이었는데 유비의 숙부 이름인 유경을 피휘(군주나 자신의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관습)하여 자도(子度)로 바꿨습니다.

 


유장

건안(196~220) 초 맹달은 기근(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모자라 굶주림)을 피해 동향 사람인 법정과 함께 고향을 떠나 익주로 가서 유장에게 의지했습니다.

 

한중의 장로와 원수 관계였던 유장은 조조에게 의지하기 위해 장송을 사자로 파견했습니다. 전쟁을 앞둔 조조에게 냉대당한 장송은 유장에게 조조가 아닌 유비를 끌어들이자고 진언했습니다. 유장은 장송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비를 불러들였습니다.

 


유비

유장은 법정과 맹달에게 2천의 군사를 주어 유비를 지원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법정과 맹달은 유비가 익주를 정복하도록 도왔습니다. 결국 유비는 익주를 차지했고 맹달은 의도태수에 임명되었습니다.

 

 

219년 유비와 조조의 전쟁에서 맹달은 유봉과 함께 상용군 공격을 맡았습니다. 맹달은 자귀에서 출정하여 방릉을 공격했고 방릉군 태수 괴기를 격파하고 상용가지 나아갔습니다. 한중에서 출진한 유봉과 함께 상용을 공격했습니다. 상용 태수 신탐은 항복하여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의 동생 신의는 서성태수에 임명되었습니다.

 

관우는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고 유봉과 맹달에게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맹달과 유봉은 이제 막 차지한 군을 동요시킬 우려가 있다며 거절했습니다. 결국 관우는 정쟁에서 패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유비는 이 일로 크게 화가 났습니다. 맹달은 유봉과 불화가 생겼고 군악대를 뺏기기도 했습니다.

 

 

관우의 원군 요청을 거절하다

220년 맹달은 관우에게 원군을 보내지 않고, 유봉과 불화까지 생겨 불안에 빠졌고, 유비에게 편지를 남기고 부곡 4천여 호를 이끌고 위나라로 귀순했습니다. 당시 위나라는 조비가 왕위에 올랐을 때로 조비는 맹달에 대해 높은 평가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조비

맹달은 초에 이르러 조비를 만났고, 조비는 경은 혹시 유비가 보낸 자객은 아니겠지요?’라는 농담과 함께 맹달을 환영했습니다. 맹달은 산기상시에 임명되었고 신성(방릉, 상용, 서성)태수를 겸했습니다. 조비의 신하들 중에는 맹달에게 한 지방을 맞기기는 불안하다고하는 신하들도 있었지만 조비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정남장군 하후상이 신성군 탈환을 건의했고 맹달은 서황과 함께 상용을 공격했습니다. 맹달은 유봉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유봉은 거절했습니다. 결국 유봉은 신의의 배반으로 패배하고 성도로 도망쳤습니다.

 

 

 

 



조예 

226년 맹달을 총애하던 조비가 세상을 떠나고 조예가 뒤를 이었습니다. 가깝게 지내던 환계, 하후상 등도 세상을 떠난 후였고 항복한 장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맹달은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갈량과 이엄은 맹달의 상황을 알고 맹달에게 서신으로 접근했습니다.

 


제갈량

227년 전쟁을 시작하려고 생각한 제갈량은 한 번 배신을 했던 맹달이 또 배신을 할 것이 여려되어 곽모를 신의에게 위장 귀순시키고 맹달과 모의한 내용을 흘렸습니다. 평소 맹달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신의는 표를 올려 맹달이 촉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조예는 신의의 의견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마의

신의가 표를 올린 사실을 알게 된 맹달은 불안에 빠져 서둘러 모반을 준비했습니다. 사마의는 참군인 양기를 파견하여 맹달을 살피게 했고, 맹달에게 조정에 들어올 것을 권했습니다. 맹달은 모반을 일으켰습니다.

 

신성군의 지세는 매우 깊고 험했습니다. 맹달이 신성에 처음 들어가 백마새에 올랐을 때 말했습니다.

맹달 유봉과 신탐은 금성천리(천리 땅에 걸친 견고한 성)를 점거하고도 남에게 빼앗겼구나...”

 

맹달은 신성군의 지세와 낙양, 완에서 거리를 생각하여 진압군이 도달할 때까지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고 험한 지형에 사마의가 직접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사마의는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고 주태를 선봉에 세워 바로 출진하여 8일 만에 상용에 도착했습니다.

 


죽음

228년 사마의는 공성을 시작한지 16일 만에 맹달의 조카 등현과 장수 이보의 배신으로 인한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사마의의 빠른 대응으로 촉나라, 오나라의 원군이 상용에 도착하기 전에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맹달은 세상을 떠났고 수급이 낙양으로 보내져 불태워졌습니다.

 

맹달의 아들 맹흥은 의독군으로 있다가 촉이 멸망한 후 264년에 부풍군으로 이주했습니다.

 



2차 창작물에서 맹달의 이미지

삼국지 관련 소설, 만화, 게임 등에서 맹달은 배신의 아이콘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우에게 원군을 보내지 않은 일을 시작으로 촉나라을 배신하고,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지자 다시 위나라를 배신한 일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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