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왕평 ( ? ~ 248년)
왕평은 파서 탕거 출신으로 자는 자균(子均)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외가(어머니의 친정)인 하씨 집안에서 자라며 하평이라고 불렸습니다. 이후 원래 성씨인 왕씨로 돌아갔습니다.
조조, 유비
왕평은 파서 이민족인 두호와 박호를 따라 낙양에 이르러 가교위가 되어 조조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조조를 따라서 한중공방전에 참전했고, 219년 유비에게 투항했습니다. 왕평이 유비에게 투항한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유비는 왕평을 받아들이고 아문장, 비장군으로 임명했습니다.
가정 전투
228년 제갈량이 1차 북벌을 시작했고, 왕평은 마속의 부장으로 참전했습니다. 제갈량은 요충지인 가정을 선점하고 마속에게 수비를 맡겼습니다. 마속은 이점만을 생각하고 단점은 생각하지 않으며 제갈량의 명을 어기고 산으로 올라가서 진을 치는 실수를 했습니다. 왕평이 이를 반대하며 마속에게 간언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위나라 장합의 군대가 도착하여 보급로를 차단하자 마속의 군대는 힘든 상황에 빠졌고 결국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패배한 마속의 군대는 산산이 흩어졌는데, 왕평이 이끄는 1천명은 북을 울리며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였고, 장합은 복병을 경계하며 쉽게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왕평은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퇴각했습니다.
가정을 잃게 되면서 거점을 잃은 제갈량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1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제갈량과 조운의 직위는 강등되고 마속은 참수를 다했습니다. 장휴, 이성을 주벌(꾸짖어서 벌을 줌) 했고 황습 등의 병사는 박탈당했습니다. 하지만 왕평은 특별히 공을 높게 인정받아 이민족들로 구성된 군대인 오부를 통솔하게 하고, 토구장군으로 승진시켰으며, 정후에 봉해졌습니다.
장합과의 싸움
231년 제갈량은 4차 북벌을 시도했고, 왕평도 이에 참전했습니다.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했고, 왕평에게 남쪽을 맡겼습니다. 위나라의 사마의는 교전을 원하지 않았지만 장합은 교전을 해야 한다고 간언했습니다. 결국 사마의는 장합에게 왕평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제갈량과 교전했습니다. 왕평은 장합을 상대로 굳게 지켜내며 승리했고, 제갈량 또한 사마의에게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위연의 난
234년 제갈량은 5차 북벌을 시도했고, 왕평도 참전했습니다. 제갈량의 목숨이 위독해지면서 제갈량은 양의, 비의, 강유를 불러 자신이 죽고 난 후 철군할 것을 명했고, 위연에게 뒤를 맡겨 위나라의 군대를 요격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양의와 사이가 나빴던 위연은 비의에게 양의의 지휘를 받아 뒤를 지키는 장수가 되긴 싫다며, 제갈량이 죽었지만 자신이 직접 군을 지휘해 싸우겠다고 말했습니다. 양의와 비의는 제갈량의 명을 따라 철군을 시작했는데, 위연을 이를 보고 격노하여 본대보다 앞서서 촉으로 통하는 잔도를 불태웠습니다. 위연과 양의는 서로 상대방이 반란을 일으켰다며 조정에 보고했습니다.
위연은 남곡구를 점거하고 양의군과의 싸움을 준비했고, 양의는 왕평, 마대에게 위연을 토벌하도록 했습니다. 왕평은 위연의 군대를 만나 “승상(제갈량)께게 막 돌아가셨는데 승상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너희들은 어찌 이런 더러운 일에 몸을 담았는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왕평의 말을 들은 위연의 병사들은 흩어졌고, 결국 위연의 군대를 제압했습니다. 이후 위연은 아들들과 함께 마대에게 참수 당했습니다.
위연의 난을 제압하는데 고을 세운 왕평은 후전군, 안한장군이 되었고 거기장군 오의를 보좌하며 한중태수를 겸했습니다.
한중을 지키다
237년 안한후에 봉해졌고 오의가 죽은 뒤 독한중이 되어 한중을 지켰습니다. 238년 대장군 장완이 면양에 주둔하면서 왕평은 전호군이 되었고, 장완의 대장군부 일을 맡아 처리했습니다. 243년 장완이 병으로 부현으로 돌아가면서, 왕평은 전감군, 진북대장군이 되어 한중을 통솔했습니다.
낙곡 대전
244년 봄, 위나라의 대장군 조상은 등양, 이승 등의 조언을 따라 하후패, 곽회, 사마소 등을 동원해 대군을 이끌고 촉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촉나라에서 위나라의 공격을 확인했을 때는 조상군의 선봉이 이미 낙곡에 있었습니다.
한중을 지키는 병사는 3만이 되지 못하여 위나라의 대군에 장수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어떤 장수가 말했습니다. “지금 힘이 부족한데 적을 막아야 하니, 마땅히 한성과 낙성을 굳게 지키고 도적(위나라 군대)들을 만나면 깊이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는 사이에 부현의 군대가 양평관을 족히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평 “그렇지 않소, 한중에서 부현까지 가면 거의 1천리요. 도적들이 만약 양평관을 얻는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할 것이오. 유호군과 두참군을 먼저 보내어 흥세산을 점거하게 하고 제가 뒤에서 막을 터이니, 만약 적이 군사를 나누어 황금곡으로 향하면 제가 1천명을 이끌고 내려가 직접 공격할 것이고, 그 사이 부현의 군대가 도착할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오.”
왕평은 양평관까지 내줄 경우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소수의 병력이라도 험한 산지를 활용하여 적의 진군을 늦추고 부현에서 병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자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왕평의 의견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지만, 호군 유민은 왕평과 뜻을 같이 하며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결국 비의, 강유 군대가 지원을 올 때까지 버티며 위나라 군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등지가 동족에 있었고, 마충이 남쪽에 있었으며, 왕평은 북쪽 경계에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칭송을 받았습니다.
죽음
248년 왕평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왕훈이 뒤를 이었습니다.
문맹, 행동, 성격
왕평은 문무를 겸비한 장수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은 문맹이었습니다. 군대에서 자라 손으로 글씨를 쓰지 못하고 아는 글자도 10자를 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지 못할뿐 자신이 입으로 말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게 하여 글을 지었는데 이는 조리 있는 문장이었습니다. <사기>, <한서>와 같은 책들을 다른 사람에게 읽어 달라고 하여 그 내용을 논했고, 말할 때 요지을 파악했습니다.
왕평은 법도를 지키고 농담을 하지 않았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르게 앉아 하루를 보내니 무장이 아닌듯한 모습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말하는 면이 있어 명예가 깎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삼국지연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왕평은 조조의 장수로 한중공방전에서 서황의 부장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서황이 물을 건너서 싸우자고 했지만, 왕평은 이를 반대했습니다. 서황은 왕평의 말을 무시하고 싸우다가 황충과 조운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서황이 돌아와서 왜 강을 건너와서 도와주지 않았냐며 왕평에게 따지자, 왕평은 자신이 출진했으며 진채까지 빼앗겼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로 서황과 왕평은 원한을 품게 되고 왕평은 유비에게 투항하게 됩니다.
이후 남만 정벌, 북벌에서 활약하지만 아쉽게도 왕평이 크게 활약한 낙곡대전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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