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유찬
삼국시대 유찬은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유찬(留贊) (183년~255년)
유찬(留贊)은 회계 장산 출신으로 자는 정명(正明)입니다. 그는 젊어서 군리가 되었고 황건적의 두목 오환과 싸워 그를 해치웠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다리를 다치며 다리가 굽어 펼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유찬은 한쪽 다리가 불편해져도 포기하지 않고 병서와 삼사(사기, 한서, 동관한기)를 즐겨 읽었고 옛 명장들이 전공을 세운 기록을 보며 탄식했습니다. 유찬은 가까운 친척들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지금 천하가 어지럽고 소란하여, 영웅과 호걸이 나란히 일어나는데, 과거의 일을 두루 살펴보니, 부귀는 보통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건만, 나는 앉은뱅이가 되어 여항에 있으니, 죽으나 사나 달라질 것이 없소. 지금 내가 내 다리를 자르려하는데, 다행이 죽지 않고 다리가 펴지면, 아마 다시 쓰임을 얻을 것이나, 죽으면 그걸로 끝이오.”
친척들은 모두 그를 말렸지만 유찬은 기어코 자신의 다리의 근육은 잘랐습니다. 유찬은 피를 많이 흘리며 한동안 기절했고 친척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이 일로 유찬은 다시 다리를 펼 수 있게 되었고 상처가 다 낫자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능통을 만나 손권을 따르다.
능통은 유찬의 소식을 듣고 유찬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능통은 유찬을 기이하게 여기고 표를 올려 그를 천거했습니다. 손권은 유찬을 등용했고 유찬은 계속해서 공을 세워 둔기교위까지 승진했습니다.
유찬은 아첨을 하지 않고 직언(옳고 그른 것에 대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기탄없이 말함. 곧은 말)했기 때문에 손권을 그를 꺼려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동흥 전투
제갈근의 장남 제갈각이 동흥제를 재건하고 제방을 낀 형태로 성을 쌓자 위나라는 제갈탄, 호준을 시켜 동흥을 공격합니다. 제갈각은 유찬, 여거, 당자, 정봉을 보내 그들과 싸우게 했습니다. 위나라의 호준 등은 오나라의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방심했고 유찬의 부대는 길을 우회해서 적을 공격했습니다. 위나라의 군대는 많은 피해를 입었고 유찬은 공을 인정받아 좌장군에 임명되었습니다.
마지막 싸움
255년 관구검과 문흠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손준은 유찬을 좌호군에 배수하고 그들을 토벌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유찬은 가는 길에서 병에 걸리게 되고, 손준은 수레와 치중을 거느리고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제갈탄은 장반을 보내 유찬을 추격하게 했고 유찬의 부대는 장반이 이끄는 4천의 병사들에게 따라잡히게 됩니다.
유찬은 자신의 병이 깊어 승기가 없음을 깨닫고 곡개(수레 위에 받쳐 햇빛을 가리는 덮개)와 인수(벼슬을 나타내는 끈)를 풀어 조카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장수가 된 이래로 많은 적을 격파하고 깃발을 빼앗았지만 일찍이 패배한 적은 없었다. 지금 내 병이 깊고, 병사들은 약해져 있고 수 또한 많이 차이가 나니, 너는 어서 가거라. 모두 죽는 것은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적을 기쁘게 할 뿐이다.”
조카는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유찬은 칼을 뽑아 강하게 말했고 그제야 조카는 도망쳤습니다.
유찬은 적을 만나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고 병사들이 이에 호응했습니다. 노래가 그치면 나가서 싸워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병이 깊어 패배를 앞에 두고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내 싸움에는 항상 방법이 있었는데, 지금 이처럼 병이 깊으니 진실로 천명이구나...”
죽음
255년 유찬은 세상을 떠났고 많은 사람들이 깊게 슬퍼했습니다. 유찬의 두 아들 유략, 유평은 이후 나란히 대장이 되었습니다.
유찬(劉纂)
유찬(劉纂)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손권의 둘째 딸(손노반의 동생, 손노육의 언니)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이 죽고, 손노육의 남편 주거가 죽자 손노육과 재혼했습니다.
유찬(劉瓚)
유찬(劉瓚)은 유비이 아들이자 촉의 황제 유선의 넷째 아들로 256년 신평왕으로 봉해졌습니다. 263년 촉이 멸망한 후 가족들과 함께 위나라에 가서 살다가 311년 영가의 난에 연루되어 피살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