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두습 ( ? ~ ? )
두습은 예주 영천군 정릉현 사람으로 자는 자서(子緖)입니다. 두습의 증조 할아버지 두안과 할아버지 두근은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표
두습은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해 형주로 가게 되었고 유표는 같은 군 출신의 두습, 조엄, 번흠 등을 빈객(귀한 손님)으로 대우했습니다. 번흠은 유표에게 자신의 재능을 보이며 유표를 놀라게 했는데 두습은 그런 번흠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들과 함께 온 이유는 물속에 잠겨 있는 용처럼 있다가 때를 기려 봉황처럼 비상하려는 것입니다. 어찌 그대는 유목(유표)이 반란을 평정할 수 있는 군주로 생각하고 그에게 의탁하려는 것입니까? 그대가 만약 이런 능력밖에 나타낼 수 없다면 나의 친구가 아닙니다. 나는 그대와 절교하겠습니다.”
번흠은 두습의 말을 듣고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했고 두습은 장사로 내려갔습니다.
조조를 따르다.
196년 조조는 헌제를 모시고 허창을 수도로 정했습니다. 두습은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갔고 조조는 두습을 서악현의 현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두습이 서악현장이 되었을 때 서악현은 잦은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성곽을 수비하느라 농사일을 하지 못해 궁핍한 상태였습니다. 두습이 노약자들에게 집으로 돌아가 생산 활동을 하게하고 건장한 청년들만 성을 지키도록 하자 백성들은 기뻐했습니다.
형주에서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보내 성을 공격했습니다. 두습은 관리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밖에 가족들이 있어 그들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성을 나가도록 해주었는데 그들은 모두 죽을 각오로 성을 지킬 것을 각오했습니다. 두습은 직접 화살과 돌을 들고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두습이 이끄는 사람들은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그들도 피해를 입었고 결국 성을 내주고 맙니다. 두습은 부상당한 사람들을 이끌고 탈출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지만 배신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례교위 종요는 표를 올려 두습을 의랑삼군사로 추천했고 두습은 의랑삼군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순욱도 두습을 천거해 조조는 두습을 승상군제주로 임명했습니다. 213년 상서, 시중, 육경이 설치되면서 두습은 왕찬, 위기, 화흡과 함께 시중이 되었습니다. 왕찬은 기억력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었기 때문에 조조가 유람을 다닐 때 함께 수레를 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지만 존경을 받는 점에 있어서는 화흡, 두습에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후 두습은 승상장사를 겸임하다가 215년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공격하는데 함께 했습니다. 조조는 한중을 차지하고 두습을 부마도위에 임명했고 한중에 남아서 군사를 통솔하게 했습니다. 두습의 성공적인 정치로 8만여 명의 사람들이 낙양, 업으로 이주했습니다.
219년 한중을 수비하던 하후연이 유비군에게 죽었고 남은 장수들과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두습은 장합, 곽회와 함께 군대를 통솔하며 장합을 대장으로 삼아 장수와 병사들을 안정시켰습니다.
조조는 한중을 잃고 유부장사를 뽑아 장안을 지키게 하려고 했는데 적합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조조는 두습을 유부장사로 임명해 관중에 주둔하게 하며 수비를 맡겼습니다.
조조를 설득하다.
관중의 허유는 자신의 부하를 거느리며 조조를 따르지 않고 불손하게 굴었습니다. 화가 난 조조는 허유를 토벌하려고 했는데 신하들은 허유를 회유하는 것이 더 좋다고 했지만 조조는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두습이 조조에게 의견을 말하려고 하자 조조는 자신이 이미 결심했으니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습은 현인은 현인만이 알아보고, 성인은 성인만이 알아보고 보통 사람은 비범한 인물을 알아보지 못한다며 조조를 설득했고 조조는 두습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조조는 허유를 설득했고 허유는 조조에게 귀의했습니다.
조비
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뒤를 이으면서 두습은 관내후에 봉해졌습니다.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두습은 독군량어사에 임명되었고 무평정후에 봉해졌습니다. 이후 독군량집법이 되었고 조정으로 들어가 상서가 되었습니다.
조예
227년 조비가 죽고 조예가 뒤를 이었고 두습은 평양향후에 봉해졌습니다.
228년 제갈량이 위를 공격했을 때 대장군 조진은 이를 막으러 가면서 두습을 대장군 군사로 삼았습니다. 231년 조진이 죽고 사마의가 조진의 임무를 맡으면서 두습은 다시 한 번 대장군 군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죽음
이후 병으로 조정으로 돌아가 태중태부가 되었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습은 죽은 후 소부로 추증되었고 시호를 정후라고 했습니다. 두습이 죽고 아들 두회가 뒤를 이었습니다.
평가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두습을 온화하고 순수하며 일을 원만하게 처리했으니 한 시대의 훌륭한 선비라고 평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