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 유엽

삼국지 유엽 ( ? ~ ? )

 

유엽은 양주 회남군 성덕형 출신으로 자는 자양(子揚)이며 광무제 유수의 아들 부릉왕 유연의 후손입니다유엽의 아버지는 유보이고 어머니는 수씨입니다그들은 유환과 유엽을 낳았습니다.

 

어린 시절

유엽의 형 유환이 아홉 살이고유엽이 일곱 살일 때 어머니 수씨는 병으로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수씨는 병상에 있을 때 시비 한 명이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해치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며 자신이 죽은 뒤 집안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 걱정된다는 말을 했습니다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열세 살 때 결국 유엽은 시비를 없애고 어머니의 묘에 참배를 했습니다놀란 집안사람들이 아버지 유보에게 알리자 유보는 유엽을 데려오라고 명했습니다유엽은 집에 돌아와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씀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며 사죄했습니다.

 

여남군의 허소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양주에 왔을 때 유엽을 보고 세상을 보좌할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정보

유엽은 노숙과 친구사이였는데 노숙에게 편지를 보내 거소에서 병사를 모으고 있는 정보를 따르자고 권했습니다노숙은 유엽의 말을 듣고 정보(손가를 모신 정보와는 다른 인물)에게 가려다가 주유의 설득으로 손권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정보는 장다허건처럼 무리를 이끌고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날쌔고 과감했습니다정보가 백성들을 내몰고 핍박하며 장강을 건너 강남으로 가게 했는데 유엽의 명성을 이용해 일을 주도했습니다당시 유엽은 스무 살이었는데 이 일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침 조조가 사자를 파견해 그 곳의 정보를 조사했습니다유엽은 사자를 만나 일어난 일을 말하고 정보를 처리할 계획을 세워 사자를 며칠간 더 머물게 했습니다정보는 수백명의 백성을 거느리며 술과 고기로 사자를 대접하려 했고 유엽은 정보와 함께 술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정보를 베다.

유엽은 몰래 건장한 사람들을 모아 술잔을 따라주는 틈에 정보를 베려고 했지만 정보는 술을 좋아하지 않아 술을 먹지 않았습니다결국 유엽은 직접 정보의 머리를 베었고 정보의 수하들에게 호령했습니다. “조공(조조)의 명령이 있으니 함부로 행동하는 자는 정보와 마찬가지로 다스리겠다!”

 

정보의 수하들은 두려워하며 달아났고 유엽은 그들이 혼란을 일으킬 것이 걱정되어 남은 무리의 두목을 설득했습니다유엽의 말을 들은 무리들은 유엽을 따르게 되었습니다하지만 유엽은 한나라 왕실을 생각하여 사병을 거느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강태수 유훈에게 수하들을 넘겨주었습니다.

 


유훈

여강태수 유훈의 세력을 견제한 손책은 유훈에게 재물과 편지를 보내 상료 지역을 공격할 것을 요청했습니다유훈은 손책의 말을 믿으며 그의 선물에 기뻐했고 다른 관리들은 유훈을 축하해 주었습니다유엽이 유훈에게 말했습니다. “상료는 작지만 견고해 공격하기는 어렵고 막기는 수월합니다만약 빠른 시간 안에 함락하지 못한다면 병사들은 지치게 되고 그 틈을 타서 손책이 우리를 공격한다면 지켜낼 수 없습니다손책의 말을 듣고 상료를 공격하면 화가 닥칠 것입니다.”

 

하지만 유훈은 유엽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군을 이끌고 상료를 공격했습니다손책은 유훈의 후방을 공격했고 패배한 유훈은 본거지를 잃고 도망쳐 조조에게 의지했습니다.


 

 

 



조조를 따르다.

여강에는 조조가 몇 번이나 토벌군을 보냈지만 토벌하지 못한 진책이라는 산적이 있었는데 조조는 그들을 처리할 방안을 물었습니다조조의 수하들은 그 곳이 험준해서 공격하기 어렵고 얻는다 해도 그다지 이로울 것이 없으며 잃는다 해도 그다지 손해 볼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하지만 유엽은 진책을 토벌하여 위세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했고 조조는 유엽의 말을 받아들여 뛰어난 장수를 보내 진책을 토벌하고 유엽을 사공창조연에 임명했습니다.

 

조조가 장로를 토벌할 때 유엽은 주부로 임명되었습니다조조는 한중에 가는 길이 험하고 군량도 떨어져갔기 때문에 회군을 결심했습니다하지만 유엽은 장로를 토벌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군량 수송로를 끊어 회군하지 못하게 했고 조조에게 공격할 것은 조언했습니다유엽의 말은 받아들인 조조는 장로를 공격했고 결국 장로를 토벌하고 한중을 점령했습니다.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자 유엽은 조조에게 말했습니다. “유비가 촉나라를 다스린 것이 얼마 되지 않았고 우리가 한중을 함락해서 그들은 놀라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이 기세를 타서 그들을 공격해야 합니다만약 그들에게 시간을 주어 안정되게 한다면 다스리는 능력이 좋은 제갈량뛰어난 맹장들인 관우장비 등이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유엽의 말을 듣지 않고 돌아갔습니다한중에서 돌아온 이후 유엽은 행군장사가 되었고 영군의 직책을 겸했습니다.

 


조비

조조가 죽고 아들 조비가 뒤를 이었습니다촉나라의 장수 맹달은 관우의 일로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했습니다조비는 맹달을 총애하며 신성태수에 임명했습니다유엽은 맹달이 충성심이 없고 신성은 요충지이기 때문이 상황이 바뀌면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며 이를 반대했지만 조비는 자신의 뜻을 거두지 않았습니다유엽의 말대로 맹달은 훗날 모반을 하게 됩니다.

 

220년 유엽은 시중으로 임명되고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습니다촉나라가 관우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 말할 때 대부분의 신하들은 촉나라가 관우라는 명장을 잃고 출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유엽은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부자 관계와 같이 깊은 사이라며 군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유엽의 말대로 유비는 군을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손권이 조비에게 복종하기를 구하자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기뻐했습니다하지만 유엽은 손권이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며 그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조비를 유엽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손권을 오왕에 임명했습니다.

이후 손권이 태도를 바꾸자 조비는 군을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하려 했습니다유엽은 지금은 오나라가 안정되어 있어 때가 아니라며 조비를 말렸지만 조비를 오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조비에게 인정받다.

224년 조비는 광릉의 사구에 가서 전쟁에 함께 했습니다조비는 신하들에게 손권이 직접 나서서 오지 않겠냐고 물었고 신하들은 손권이 두려워하며 항복하거나 병사를 이끌고 직접 와서 싸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유엽은 손권이 후방에 남고 수하 장수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고 유엽의 말대로 손권은 후방에 남아있었습니다조비는 오나라와 촉나라의 멸망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유엽이 옳았음을 인정했습니다.

 


조예

조비가 죽고 조예가 뒤를 이었고 유엽은 동정후에 봉해졌습니다조예가 선조들의 시호 문제를 논의하게 했을 때 유엽은 위진과 같은 내용의 상주를 했고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죽음

232년 유엽은 병으로 한가한 직무에 속하는 태중대부가 되었다가 얼마 후 대홍려가 되었습니다. 2년 뒤 다시 태중대부가 되었고 세상을 떠났습니다유엽이 죽고 아들 유우가 뒤를 이었습니다유엽의 자식은 유우와 유도가 있었습니다.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 유엽은 곽가의 추천으로 조조를 섬기게 됩니다조조와 원소가 싸울 때 유엽은 발석거를 개발하여 심배의 전략을 무력화 시켰고 이 발석거는 원소군에게 벽력차(벼락수레)라고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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