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공손도 ( ? ~ 204년)
공손도는 유주 요동군 양평현 출신으로 자는 승제(升濟)입니다. 공손도(公孫度)의 度는 탁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공손탁이라고 쓰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공손도의 아버지 공손연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관리의 추격을 받았고 이를 피해 가족들과 함께 현도군에 가서 살았습니다. 공손도의 어린 시절 이름은 공손표였고 낮은 관리가 되어 일했습니다.
공손도의 상관이자 현도의 태수 공손역은 열여덟에 요절한 자신의 자식 공손표와 나이도 비슷하고 이름도 같은 공손도를 친아들처럼 생각하며 아껴주었습니다. 그는 공손도(공손표)에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스승을 붙여주고 결혼도 도와주었습니다.
귀향
169년 공손도는 유도로 천거되어 상서랑에 임명되었고 이후 기주자사까지 승진했습니다. 하지만 유언비어(근거 없이 널리 퍼진 소문, 뜬소문)가 돌면서 면직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요동태수가 되다.
요동의 호족들은 한미한 가문(가난하고 지체가 변변하지 못한 가문) 출신인 공손도를 무시하며 곱게 보지 않는 호족들이 있었습니다. 189년 동탁의 중랑장이자 같은 유주 출신인 서영의 추천으로 공손도는 요동태수에 임명되었습니다. 공손도는 요동태수로 부임하고 자신을 무시하고 곱게 보지 않았던 공손소, 전소 등의 호족들을 숙청했습니다.
왕을 꿈꾸다.
공손도는 세력을 키워나가며 동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오환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전란 등으로 인해 중원 지역이 혼란에 빠지자 공손도는 자신의 가까운 심복인 유의와 양의에게 말했습니다.
“참서(참위서)에서 손등(孫登)이 천자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나의 성이 공손(公孫)이고 자가 승제(升濟)이며 승(升)은 즉 등(登)이니 한나라가 몰락한다면 당신들과 왕업을 도모하겠소.”
양평형 연리에서 한 장의 길이에 돌을 세 개의 작은 돌이 받치고 있는 거석을 발견했는데 어떤 사람이 공손도에게 해석을 해주었습니다.
“마을 이름은 연리로 당신의 아버지의 이름(공손연)과 같고 사(社)는 토지를 관리하는 귀신이니 당신이 땅을 차지하고 삼공이 당신을 보좌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들은 공손도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하내태수를 지냈던 이민은 공손도의 행동을 꺼려했기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바다를 거쳐 도망쳤습니다. 분노한 공손도는 이민의 아버지의 묘를 파헤치고, 관을 부수고, 시체를 불태우고, 일족들을 해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요동의 왕
공손도는 요동군을 나누어 요서에 중료군을 만들고 태수를 임명했고 산동 반도에 있는 동래군의 여러 현을 정복하고 영주자사를 두며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공손도는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을 칭하고 아버지 공손연을 건의후로 추봉했습니다. 한 나라 두 왕조인 유방과 유수의 제묘를 세우고 천지(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열병식(정렬한 군대의 앞을 지나면서 검열하는 의식)을 하고 난거(임금이 탄 수레)를 이용하며 구류(임금의 관)을 착용하고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왕처럼 행동했습니다.
당시 요동에는 전란을 피해서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공손도는 피난 온 사람들 중에서 왕렬 , 관녕 , 병원, 국연 등을 등용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거절하고 재야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며 지냈습니다.
고구려, 부여
공손도는 고국천왕(고구려의 9대왕, 국양왕)의 대가(고구려 때 5부족의 우두머리) 우거, 주부, 연인 등과 함께 부산적을 무찌르기도 했습니다. 고구려와 다투는 일도 있었고 부여의 왕 위구태에게 가문의 사람을 시집보내며 우호를 맺기도 했습니다.
191년 고국천왕이 죽은 이후 발기가 동생 산상왕(고구려의 10대왕)과 왕위 쟁탈을 위해 싸우다가 밀려나 공손도에게 망명했습니다. 공손도는 발기에게 3만의 병사를 지원해주었고 발기는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동생 계수에게 패하고 자결했습니다.
발기(拔奇) - 신대왕의 첫째 아들, 어리석다고 하여 태자가 되지 못함
고국천왕(남무) – 신대왕(고구려의 8대왕)의 둘째 아들
발기(發岐) – 신대왕의 첫째 아들, 동생 산상왕과 왕위 분쟁에서 패배
산상왕(연우) – 신대왕의 넷째 아들, 고국천왕의 동생, 고국천왕이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형수 우씨의 지지를 얻어 즉위
계수 – 신대왕의 다섯째 아들, 고국천왕과 산상왕 시대에 장수로 활약
패기
조조가 공손도를 무위장군, 영녕향후에 임명하자 공손도는 “내가 요동의 왕이다! 영녕향후가 무슨 대수냐!” 라며 인수를 무기창고에 처박았습니다.
죽음
204년 공손도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공손강이 뒤를 이었습니다. 공손강의 동생 공손공은 영녕향후에 임명되었습니다. 공손도의 손자는 공손강의 아들 공손황과 공손연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