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채옹 (132년~192년) 후한 말
채옹은 연주 진류군 어현 사람으로 자는 백개(伯喈)입니다. 채옹은 젊었을 때부터 뛰어난 학문, 글씨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천문, 음률에도 뛰어났습니다. 170년 영제 때 사도 교현이 채옹을 불렀고 채옹은 낭중이 되었습니다. 동관에서 교정으로 있다가 의랑이 되었습니다.
희평석경
175년 조정에서는 유학자들에게 육경의 문자를 바로잡게 했습니다. 의랑으로 있던 채옹은 고문, 전서, 예서 등 세 가지 서체로 적었고 석공에게 그 글씨를 비석에 새기게 했습니다. 그 비석은 태학의 문 밖에 세워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 비석을 보기위해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이 비석이 <희평석경>입니다.
환관 정황의 모함
178년 궁궐에 푸른 무지개가 나타났습니다. 이를 본 채옹은 부정부패한 사람들을 쫓아내고 올바른 사람들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채옹이 상소한 글에는 부정부패한 사람에는 중상시 정황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황관 조절이 채옹의 글을 보고 정황에게 알렸고 정황은 채옹에게 앙심을 품게 됩니다.
정황은 채옹을 모함했고 채옹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중상시 여강이 채옹을 구하기 위해 무죄를 주장했고 결국 목숨은 구했지만 삭방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179년 중상시 여강은 상소를 올라 채옹을 등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귀양을 가있던 채옹은 사면령을 받았지만 이후에도 환관들의 핍박을 받아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동탁의 총애를 받다.
189년 영제가 죽고 소제(유변)가 즉위했고 십상시의 난이 일어나 대장군 하진이 죽고 동탁이 기회를 잡아 조정의 권력을 잡게 됩니다. 정권을 잡은 동탁은 채옹의 명성을 듣고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채옹은 병을 핑계로 거절했지만 동탁이 채옹의 가족들의 목숨으로 협박을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관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동탁은 채옹의 능력을 인정하여 사흘 동안 이례적인 고속 승진을 시켰고 그를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채옹을 고제로 천거하여 시어사에 임명했다가 지서어사, 상서를 거쳐 파군태수, 시중에 임명했습니다. 이후 좌중랑장으로 승진했고 고양후로 봉해졌습니다.
동탁은 소제(유변)을 폐위하고 헌제(유협)을 옹립할 뜻을 밝혔는데 다른 이들은 모두 동탁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노식은 동탁에게 반대를 했습니다. 동탁은 노식을 해치려 했지만 채옹이 노식의 서찰을 받고 달려와 감싸면서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결국 소제는 폐위되고 헌제가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190년 채옹은 화제의 묘호 목종, 안제의 묘호 공종, 순제의 묘호 경종, 환제의 묘호 위종을 없애자고 건의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
죽음
192년 여포가 왕윤에게 설득당하면서 동탁은 왕윤과 여포에게 죽게 됩니다. 채옹은 동탁의 죽음을 탄식하는 말을 했는데 이를 본 왕윤은 채옹을 감옥에 가뒀습니다. 채옹은 자신에게 형벌을 내려도 좋으니 자신이 쓰고 있는 한나라 역사책을 완성하게 해달라고 왕윤에게 간청했습니다. 상서복야 사손서와 태위 마일제 등도 채옹을 구하기 위해 왕윤에게 부탁했지만 왕윤은 거절했습니다. 결국 채옹은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채옹은 학문과 글씨, 음악이 뛰어났고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서예의 영자팔법(한자를 쓸 때 자주 나오는 획의 종류 여덟 가지를 길 영(永) 자를 통해 설명한 것)을 고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채옹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큰 딸은 채염이고 작은 딸의 이름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채염의 딸 양휘유는 사마사의 부인이 되어 진나라 황후가 되었고, 작은 딸은 양신과 결혼하여 서진 초의 명장 양호를 낳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