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여몽 (178년~219년) 손책, 손권
여몽은 예주 여남군 부피현 사람으로 자는 자명(子明)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남쪽으로 강을 건너 매부(손위 누이나 손아래 누이의 남편) 등당에게 의지했습니다. 등당은 손책의 장수가 되어 여러 차례 산적을 토벌했습니다.
몰래 전투에 참가하다.
여몽의 나이가 15~16세에 몰래 매부 등당을 따라가 전투에 참여했고 등당은 여몽을 발견하고 놀라 그를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여몽은 돌아가려하지 않았고 등당은 전투가 끝나고 돌아가 여몽의 어머니에게 상황을 알렸습니다. 여몽의 어머니는 화를 내며 여몽에게 벌을 주려했지만 여몽이 말했습니다.
“가난하고 천한 것에는 머물 수 없고, 잘못을 벗겨내 공을 세우면 부귀가 오게 될 것입니다. 또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 새끼를 잡겠습니까?”
여몽의 어머니는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여몽을 애달프게 여겨 그를 용서해주었습니다.
손책의 수하가 되다.
등당의 수하 중에는 여몽을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몽의 이야기를 듣고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저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는 꼴입니다.”
그는 다음에도 여몽을 만나 비웃으며 모욕했고 화를 참지 못한 여몽은 그를 죽이고 고향 사람인 정장의 집으로 도망쳤다가 교위 원웅에게 자수했습니다. 원웅은 여몽을 위해 손책에게 말을 전했고 손책은 여몽을 불러서 보고는 그가 비범하고 마음에 들어 측근으로 삼았습니다.
몇 년 후 여몽의 매부 등당이 죽고 장소가 여몽을 천거하면서 여몽은 등당을 대신해 별부사마로 임명되었습니다.
손권
200년 손책이 죽고 동생 손권이 뒤를 이었습니다. 손권은 병사의 수가 적거나 활용되지 않는 병사들을 모아 병합시키려 했습니다. 여몽은 외상으로 돈을 빌려 자신의 병사들에게 진홍색 옷과 행전을 지어주었습니다. 손권 앞에서 사열하는 날 여몽의 병사들은 화려한 모습으로 평소 잘 훈련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손권은 여몽의 병사들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여몽의 병사 수를 늘려주었습니다.
이후 여몽은 단양을 토벌하는데 참가해서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고 평북도위와 광덕현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208년 손권군이 강하의 황조를 토벌할 때 황조는 도독 진취에게 수군을 맡겨 출진시켰습니다. 여몽은 선봉을 맡아 진취의 목을 베었고 사기가 오른 장수와 병사들은 성을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진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황조는 성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손권군의 병사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손권은 승리의 공을 여몽이 진취를 격파한 것으로 돌리며 여몽을 횡야중랑장으로 삼았고 돈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남군 전투
주유, 노숙, 정보 등이 서쪽으로 오림에서 조조를 격파(적벽전투)하고 조인이 지키고 있는 남군을 포위했습니다. 이때 익주의 장군 습숙이 병사를 이끌고 투항해 왔습니다. 주유는 표를 올려 습숙의 병사를 여몽에게 더해주려고 했는데 여몽은 습숙이 담력이 있어 뛰어나고 오나라로 오기위해 먼 길을 달려왔는데 의리상 병사를 늘려주었으면 늘려주었지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손권은 여몽을 칭찬하며 습숙에게 병사를 돌려주었습니다.
주유가 감녕에게 이릉을 점령하게 하자 조인은 병력을 나눠 감녕을 공격했고 병사수가 적었던 감녕은 위기에 빠졌습니다. 위급한 상황에 빠진 감녕은 구원을 요청했고 여러 장수들은 회의를 열었습니다. 대부분의 장수들은 병사수가 적기 때문에 병사를 나눠 구원을 가기 힘들다고 주장했지만 여몽은 능공적(능통)에게 본진 수비를 맡기면 능히 10일은 버틸 수 있고 그 사이에 우리가 감녕을 구원하러 가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병사 3백 명은 나무를 잘라 적의 퇴로를 막으면 적이 후퇴할 때 말을 얻을 수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주유는 여몽의 말을 받아들였고 감녕을 구원하기 위해 이릉으로 갔습니다. 주유군이 이릉에 도착하자 전투가 벌어졌고 적의 절반 이상을 격파했습니다. 피해를 입은 적군은 밤중에 후퇴하다가 나무에 퇴로가 막혀있었기 때문에 말을 버리고 뛰어서 도망쳤습니다. 주유군은 이를 추격해 말 3백 필을 얻었고 승리와 말까지 챙기자 사기가 치솟았습니다. 주유군은 강을 건너 둔영을 세우고 조인군과 싸웠고 결국 조인이 퇴각하면서 남군을 평정했습니다. 여몽은 공을 인정받아 편장군, 심양현령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괄목상대
손권은 여몽과 장흠에게 큰 임무를 맡는 만큼 학문에 정진해 견식을 넓히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여몽은 문보다 무를 중시하는 마음으로 부대의 일이 바빠 공부할 여유가 없을 것 같다고 답했고 손권은 여몽보다 더 바쁜 자신도 노력하고 있다며 공자의 말과 위인들의 예를 들어가며 여몽을 설득했습니다.
여몽은 이후 마음을 고쳐먹고 열심히 학문에 정진했고 어느새 여몽 주위에는 여몽을 학문으로 이길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210년 주유가 죽고 노숙이 주유의 일을 대신하게 되었고 육구로 가던 길에 여몽의 군영 근처를 지났습니다. 노숙은 여몽을 경시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노숙에게 여몽이 무척 뛰어난 사람이 되었다며 만나보라고 권했고 노숙은 여몽을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노숙은 여몽과 대화를 나누며 그를 다시 보게 되어 “그대는 단지 무용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학문이 넓고 예전의 오하아몽이 아니구려.” 라고 말했습니다.
여몽은 “선비는 헤어지고 사흘만 지나도 마땅히 눈을 비비고 대해야 합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여기서 학문이나 재주가 기대보다 크게 진보한 것을 뜻하는 괄목상대(刮目相對)와 세월이 지나도 학문의 진보가 없는 사람을 뜻하는 오하아몽(吳下阿蒙)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여몽 “군께서는 중임을 맡아 관우와 이웃하게 되었는데 만약의 상황을 대비할 어떤 계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노숙 “그때그때 적절하게 대응할 것이오.”
여몽 “지금 동서(손권과 유비)가 한 집안이 되었지만 관우는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이니 어찌 미리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몽을 이 말을 하며 노숙을 위해 몇 가지 계책을 제시했고 노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몽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노숙 “여자명(여몽), 경의 재략이 이 정도까지 오른지 미처 몰랐소.”
노숙은 여몽의 능력을 인정했고 여몽의 어머니에게 절하고 여몽과 친분을 맺었습니다.
유수오 건설
212년 손권군과 조조군이 장강을 끼고 싸울 때 여몽은 수차례 뛰어난 계책을 내었고 보루(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구축물)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유수오를 건축했습니다. 다른 장수들은 물가 위로 올라 적을 공격하고 물을 건너 배로 들어오면 된다며 보루가 필요없다고 했지만 여몽은 같은 병기에도 날카로운 것과 둔탁한 것이 있듯이 싸움에 있어서도 항상 이기지 못한다며 만약 적의 병사들이 몰려와 물로 돌아올 틈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 보루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환성 전투
214년 조조는 주광을 여강태수로 삼았고 주광은 환현을 중심으로 농지를 개간하고 파양의 도적 무리를 회유했습니다. 여몽은 환현의 토지가 비옥해서 몇 년이 지나면 상대의 군이 무척 강해질 것이라며 조기에 그들을 공격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손권은 여러 장수를 불러 회의를 열었고 어떤 장수는 토산을 쌓고 공성병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몽은 토산과 공성병기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해서 적의 방비가 두터워질 것이라며 지금 사방에서 공격해서 격파하고 물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손권은 여몽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여몽의 추천으로 감녕을 승성독으로 삼아 선봉을 맡겼습니다. 여몽이 손수 북을 치며 병사들의 사기를 올렸고 새벽에 공격을 가해 밥 먹을 때 쯤 적을 격파하고 성을 차지했습니다. 장료가 환성을 구원하러 왔지만 협석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성이 함락되어 되돌아갔습니다. 손권은 매우 기뻐하며 여몽을 여강태수로 임명했습니다.
여릉 토벌
여몽이 심양으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릉에서 도적들이 일어나 여러 장수들이 토벌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손권은 사나운 새 수백 마리가 물수리 한 마리만 못하다며 여몽에게 토벌을 맡겼고 여몽은 우두머리를 해치우고 나머지 사람들은 석방했습니다.
유비군과의 싸움
유비는 익주를 차지했지만 핑계를 대면서 손권에게 삼군을 반납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215년 손권은 요청을 거절당하고 분노해 여몽에게 선우단, 서충, 손규와 병사 2만 명을 이끌게 하며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여몽은 편지를 보내 항복을 권했고 장사, 계양은 항복했지만 영릉태수 학보는 항복을 거절하고 싸움을 준비했습니다.
유비는 병사를 이끌고 공안으로 진군했고 관우를 파견해 세 군을 향해 나아가게 했습니다. 손권은 노숙에게 1만의 병사를 이끌게 하여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하게 했고 여몽에게 영릉을 포기하고 노숙에게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몽은 장사를 평정하고 영릉으로 가는 길에 영현을 지나면서 등현지를 수레에 태워주었는데 등현지가 마침 학보의 옛 친구였기 때문에 그를 이용한 계책을 세웠습니다. 여몽은 손권이 보낸 편지를 숨기고 등현지에게 거짓으로 상황을 설명하며 유비는 한중에서 하후연에게 포위당하고, 관우는 남군에서 손권군의 주군과 싸우고 있고, 영현을 구하려던 군대는 손규가 격파했기 때문에 영릉을 구하러 올 사람이 없다며 항복을 권하도록 했습니다.
등현지는 학보를 만나 거짓으로 들은 상황을 전해주었고 겁을 먹은 학보는 항복했습니다. 여몽은 학보를 만나 영릉을 포기하고 노숙에게 합류하라는 손권의 편지를 보여주며 크게 웃었고 학보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워 땅 속에 숨고 싶어 했습니다. 여몽은 손교에게 영릉을 맡기고 익양으로 합류했습니다.
조조가 한중으로 내려오면서 상황이 안 좋아진 유비는 손권과 화친을 청했고 손권이 받아들이면서 장사군과 영릉군의 중앙을 흐르는 상수를 경계로 나누어 차지하기로 합의하고 학보를 돌려보냈습니다. 여몽을 공을 인정받아 심양과 양신을 봉읍으로 받았습니다.
합비 전투
같은 해인 215년 손권은 대군을 이끌고 조조군의 합비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장료, 이전, 악진 등의 활약으로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역병까지 겹쳐 퇴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료의 기습으로 피해를 입고 여몽, 능통, 감녕 등이 필사적으로 막아내며 간신히 철수했습니다.
유수구 전투
217년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유수로 쳐들어 온 유수구 전투에서 손권은 여몽을 독으로 임명해 조조군을 막게 했습니다. 여몽은 이전에 건설해둔 유수오를 점검하고 강노 1만 대를 설치했습니다. 조조군의 선봉이 진을 구축하기도 전에 여몽이 공격해 격파하고 조조군은 퇴각했습니다. 여몽은 공을 인정받아 좌호군, 호위장군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관우를 공격하다.
같은 해 노숙이 죽고 여몽이 군대를 물려받아 육구에 주둔했습니다. 노숙은 조조에게 대항해 유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여몽은 유비와 관계가 오래가기 어렵다고 생각해 손권에게 형주를 빼앗아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여몽은 속내를 감추고 관우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219년 관우가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했습니다. 관우는 수비병을 남겨 공안과 남군을 수비하도록 했습니다. 여몽은 항상 시달리는 병의 요양을 핑계 삼아 건업으로 귀환했고 관우는 병사들은 번성에 투입시키며 번성 공략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관우는 우금의 항복을 받아 3만 명의 포로가 생기자 식량이 부족해졌고 국경 지대에 있는 상관의 식량을 마음대로 취했습니다. 손권군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관우를 공격했습니다. 여몽은 심양에서 상선으로 위장하고 정예병들을 숨겼고 강변의 관우군 둔영을 습격해 그들이 공격한 사실을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
남군에 있던 미방과 공안에 있던 사인이 항복하고 여몽은 성에 들어가 관우 등의 가족들을 예로 대하고 군기를 확립해 민가에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했습니다. 여남 출신의 병사 한명이 민가에서 삿갓을 하나 가졌는데 여몽은 같은 고향 사람이라도 군령을 어겼으니 봐줄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며 군법을 집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민가는 철저하게 보호되었고 관우의 병사들은 가족이 평소보다도 더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싸울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관우는 맥성에서 농성을 하다가 맥성을 버리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장향에서 반장의 수하 마충에게 붙잡히고 아들 관평과 함께 참수 당했습니다.
손권은 마침내 형주를 평정했습니다. 손권은 여몽을 남군태수로 임명하고 잔릉후에 봉했으며 돈과 황금을 하사했습니다. 하지만 봉작이 내려지기도 전에 여몽은 병에 들어 병상에 누웠습니다. 손권은 여몽의 치료를 위해 사방으로 방법을 찾고 여몽을 치료하는 자에게 천금을 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하며 여몽의 건강에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죽음
여몽은 219년 말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손권은 여몽의 죽음에 매우 슬퍼했습니다. 여몽은 죽기 전 하사 받은 물건들을 모아 자신이 죽으면 반환하라고 명했고 장례는 검소하게 치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여몽의 아들은 여종, 여패, 여목이 있었습니다. 여몽의 작위는 여패가 이었고, 여패가 죽고 형 여종이, 여종이 죽고 동생 여목이 뒤를 이었습니다.